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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유산은 무엇일까?

여름휴가와 부모님 유품 정리

by 진주

새벽녘 말라가는 잡초 향기에 잠이 깼다. 부모님께서 사셨던 빈집에 형제들이 함께 깨끗하게 도배하고 이부자리도 새로

마련하니 쾌적하고 좋았다.

사과 과수원 하는 막내오빠 언니가 수시로 꽃밭과 마당에 잡초도 정리해 놓았다.

큰 방 서랍장을 여니 풀 먹여서 빳빳하게 다림질해 놓은 아버지 옷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옷을 정리할 때마다 추억과 함께 아픔도 하나씩 밀려왔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

옅은 바다색 줄무늬가 잔잔하게 그려진 원피스 있었다. 이웃에 사는 분들 상견례

할 때도 빌려주었던 원피스가 해지자

블라우스로 손수 만들어서 입던 옷이 그대로 있었다.




몇십 년 된 옷들이 어머니 서랍장에서 나올 때마다 대소쿠리 하나 옆에 끼고 대문 드나들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멋쟁이 아버지께서는 모자만 열 개도 넘게 남겨 놓으셨다.

머리 수술 후 쓰셨던 중절모와 여름용 연한 바다색 중절모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막내 오빠가 계란형 얼굴이라 중절모가 외국 배우처럼 어울렸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모자를 오빠가 백화점을 누비고 다녀서 겨우 찾아내어 자주 쓰셨던 모자는 작은 아버지께서 가져가셨다. 로터리 행사 때마다 쓰셨던 모자는 차곡차곡 어머니께서 모아두셨지만 흰빛이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둘째 오빠랑 올케언니는 하필 코로나가 걸리서 오지 못했다 한복은 둘째 오빠 몫으로 남겨놓았다.

아버지께서 들고 다니셨던 가죽 가방과 어머니 모시옷 한 벌, 40년 가까이 된 복고풍 코트를 가져왔다.

코트와 양복 한 벌 사드린 형부에게 아버지의 고맙다는 표현이 "니그들 이제 손구락 빨고 살아야겠다'' 하셨다고 한다. 역시 아버지다운 표현이다.

유품 정리를 끝내고 나니 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천국에 계신 부모님들이지만 이 세상에서 뵐 수 없으니 갑자기 효녀가 되었다.

안방에 걸려 있는 부모님의 앳된 결혼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

"새끼들이 시끌벅적하니 있다 강께 좋다마는 다들 바쁘게 산께 니그들도 밥 묵고 살아야제 어서들 가거라 ''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옛날처럼 같이 살 때가 좋았제' 하시는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았다.


17살에 시집와서 종갓집 맏며느리로 배고픈 이웃들에게 베풀며 시어른들 모시며 살았던 어머니의 삶 자체가 우리 형제들에게 최고의 유산이 되었다.


형부가 부모님께서 잘 드셨던 굴비를 딸들도 즐겨 먹으니 바다도 구경할 겸 법성포를 가자고 했다. 부모님 유품 정리한 마음을 려하고픈 속 깊은 마음을 모를 리 없다.

한참 달리다 보니 대초마을이라는 작은 뱃 사장 위에 영광대교가 세워져 있었다.

그 밑에는 물이 빠져 갯벌만 보였지만 뻘 에는 칠게로 유명하다고 한다. 백수해안도로가 전남에서는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여서 형부가 보여주고 싶은 절경이라고 했다. 365 계단을 밟고 바닷가 둘레 길을 걸었다. 수평선과 햇볕이 맞닿은 곳에 무지개 빛이 서려있었다.

백수해안 근처에 백암 해상 전망대가 있다. 노을로 유명한 곳 이란다. 칡넝쿨이 빽빽하게 어우러진 곳에 군데군데 이름 모를 노란 꽃이 햇볕에 축 늘어져 있었다. 다소 관리가 허술한 전망대는 주변에 쓰레기가 많아서 대충 눈요기만 하고 돌아서서 다시 법성포로 향했다.

옛날에 법성포는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조기 철이 되면 어장이 활발해서 조기 뛰는 것만 잡아도 만선을 이루었다는 말이 있다.

곡우 무렵 알 벤 조기가 법성포 근처 칠산 바다에 다다를 때쯤 가장 맛이 있을 때라고 한다.

지금은 옛 명성이 사라졌지만 다른 곳에서 잡은 조기를 옛날 방식 그대로 간하고 말려서 영광 법성포 굴비 명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알맞은 해풍과 햇빛으로 굴비를 말리는데 적절한 곳이기에 가장 맛있다고 한다.




조기를 굴비라고 부르게 된 배경은 고려 인종 때 장인이었던 이자겸이 반역을 하고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 부하인 척준경이 배반하여 법성포로 귀양 왔다.

맛이 빼어나게 좋아 "굴비"라는 이름으로 임금님께 진상하였다. 자신이 아직 건재하다는 뜻을 담아 “굴비”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것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이자겸의 자존심 표현이었다고 한다.


전라도 지방은 반찬 가짓수가 많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젓가락이 가는 곳은 굴비였다.

역시 본고장에서 맛보니 꼬들꼬들하고 짭짤하고 고소한 맛에 저절로 넘어간다.

몇 백 년 전에 반역을 했던 자가 진상했던 굴비를 임금님께서는 어떤 맛으로 드셨을까? 살이 통통하게 찐 가오리 찜도 맛있어서 리필을 세 번이나 부탁했다.




의미 있는 올여름휴가는 부모님을 추억하는 유산이 한 가지 더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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