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는 봄이 되면 뒷산에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피었고 앞산에는 진달래가 분홍 물감을 뿌려놓은 듯 지천에 피어있었다.
그 사이에 군데군데 하얗게 핀 싸리 꽃은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다 마주친, 진달래와 입맞춤하고 꽃잎은 수줍은 듯 이리저리 휘날리며 숨어버렸다. 산으로 둘러 싸인 동네였지만 대밭을 지나 평문 이를 지나면 섬진강이었다. 은빛 모래가 비단처럼 깔려 있는 뱃 사장을 걸어서 나룻배 타고 학교 다녔다.
그런데 우리 동네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었던 나룻배는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장마가 져서 잔잔하게 흐르던 섬진강 물이 황톳빛이 되어 무섭게 밀려 내려오던 날에는 모래사장과 뱃머리가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날은 우리들도 나룻배에 올라타 숨죽이듯 가방을 가슴에 안고 고개를 숙였다. 윤 씨 아저씨는 얼굴이 굳어 있었고 작시 발로 배도 삼킬듯한 물살을 가르며 저어 나갔다. 강물이 출렁거리며 배 안으로 들어올 때는 우리들은 괴성을 질러댔고 윤 씨 아저씨는 뱃머리가 돌아갈까 염려되어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자기보다 훨씬 큰 작시 발을 강물에 찔러댔다. 강물이 순할 때는 일직선으로 배가 선착장에 닿았지만 장마가 져서 강물이 넘실댈 때는 우리들이 도깨비 방죽이라고 불렀던 곳까지 떠내려가서 겨우 닿았다.
한 편의 곡예 같은 나룻배의 모험이 끝나고 강기슭을 올라가면 역 전 앞에서나 만나야 될 기차가 저만치서 고개를 내밀며 올라오고 있었다.
해 질 녘 여름 섬진강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피리 떼가 어디서 몰려왔는지 은빛으로 강 빛을 물들이며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가을에는 강 둑 아래 심어놓은 겨울철 김장 배추와 무가 튼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겨울에는 강바람이 유난히도 매서웠고 센 바람결로 모래사장에는 빗살무늬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 짚으로 지어놓은 움막에는 학교 마치고 오는 시간에 윤 씨 아저씨는 화롯불 의지한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도 가끔 움막에 들어가서 센 강바람을 피하며 화롯불에 언 손을 녹이며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벼대기도 했었다.
강물이 얼었을 때는 선착장에 매어둔 배도 같이 얼어붙어서 할 수 없이 양말을 벗고 치마를 올리고 강물을 건너갔다. 시리다 못해 나중에는 통증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선착장에 도착해서 대충 물기 닦고 얇은 양말만 신어도 따뜻했다.
물에 젖은 치마는 걸어가는 동안 얼어서 걸을 때마다 버걱 버걱 소리가 들렸다. 학교 도착하자마자 서무실로 달려가 난로가에서 불 쬐면 치마에서 짐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포클레인이 열 사람이 타고도 넘을 큰 쇠 소쿠리에 모래를 담아서 퍼 올리고 있었다. 물이 얕을 때는 배가 선착장에 닿지 않았다. 그때마다 큰 쇠 소쿠리에 우리들을 태워서 배까지 떠다 주면 신발 벗지 않아서 좋았다. 그런데 포클레인이 섬진강 정착할 때부터 아름답던 모래사장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5월에는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어서 학교 가는 내내 향기에 취해서 다녔다. 토요일 오후 포플러가 무성한 여름철에는 잎사귀로 왕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쓰고 햇빛도 가리며 다녔다.
그런데 섬진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포플러와 아카시아가 잘리고 모래사장이 없어지고 자갈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교통수단이었던 나룻배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여름휴가 때 섬진강 근처 오빠 사과 밭을 찾아갔다.
몇 년 전 폭우로 섬진강 둑이 터져서 인근 마을이 온통 물로 잠겼다. 축사도 잠겨서 소떼가 지붕 위에 애처롭게 서있는 모습도 뉴스에서 실시간 보도가 되었다.
논과 밭에 있는 농작물 벼. 고추, 참외, 수박등 흔적 없이 떠내려갔다.
막내 오빠 사과 밭도 한창 열매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을 때 새 또랑 밭이 온통 물에 잠겼다. 떠내려온 각종 부산물이 사과나무 가지에 걸쳐 있어서 할 수 없이 다 베어내어만 했다.
" 양광"이라는 품종으로 추석 무렵 수확하는 사과로 단맛과 신맛이 같이 어우러져 맛이 좋은 사과였다.
그때 터진 둑을 공사하느라 여기저기 길이 막혀 있었다. 나도 변했는데 고향이라고 변하지 않은 법이 있을까 주변공사로 아쉽기는 해도 섬진강 하나로 충분했다. 내게는 꺼내어 볼 수 있는 추억이 많은 곳이기에
문득 섬진강 노를 저어주시던 윤 씨 아저씨 얼굴이 떠올랐다. 그 시절 우리는 윤 씨 아저씨 덕분에 세상과 이어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