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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모이는 날

단어조차 생소해진 종부 종손 어느 시대 이야기일까요?

by 진주


아버지 기일이 돌아온다.

언니는 고향에 내려가자마자 먹을 수 있는 음식과 양념을 챙겼다.

부모님 살아생전에 계셨던 빈집에 모이는 날은 아버지와 어머니기일, 여름휴가이다.

좋은 계절에 하늘나라 가신 아버지 기일은 4월 25일이지만 형편상 앞 당겨 지난주 토요일 모였다.

형부, 언니, 우리 부부, 작년 여름휴가 이후 처음으로 같이 나들이하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인데 교통체증이 없었다.

예산 휴게소에서 잠시 커피 한잔 마시고 달려가니 고향 진입로인 메타스퀘어 길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쑥 쑥 뻗은 나무가 서로 맞닿은 듯 아치형으로 서있다가 차가 가까이 갈수록 길을 열어주듯 비켜서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한 밤중 12시 30분 정도 되었다.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올케언니와 오빠가 마당에 풀도 베어놓고 집안도 깨끗이 치워 놓았다. 안방 아버지 초상화가 우리를 반기듯 웃음 짓고 계셨다.

형부는 지하실로 내려가서 가동하는 보일러를 점검했다. 그리고 살아생전 부모님께서 사용하던 방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고향 진입로 메타스퀘어 길)


식구들이 모이는 일에는 누구의 수고가 뒤따르게 된다. 대가족 맏 며느리였던 어머니는 절기가 돌아오면 삼일 전부터 미리미리 준비하셨다. 그게 너무나 당연했다.


시댁도 명절이 되면 어머님과 가까이 살고 계시는 시숙님 가족들이 먼저 오셨다.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 대청소를 해놓으셨다.

우리는 항상 거래처 선물까지 드리고 난 후 출발해서 시집에 도착하면 해가 저물었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서는 형님 눈치 보시며 빨리 오지 이제 오느냐고 나무라주셨다.

속으로 차가 와야 오지 나 혼자 어떻게 올 수 있나 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형님은 식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우엉 전을 바쁘게 치고 있었다. 마지막 두부지 부치고 어머니는 옆에서 양념장을 바르셨다.

명절 형제들이 모이는 날, 친정어머니 기준을 맞추어서 큰 며느리라면 일찍 와서 일하는 게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보니 큰 며느리 희생만 강요할 수 없는데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죄송할 뿐이다.




큰 오빠, 둘째 오빠는 중, 고등학교 때부터 외지로 나가서 공부했다.

막내 오빠가 군대 제대하고 나서 할아버지 때부터 지었던 과수원을 하겠다고 나섰다. 오래된 감나무 밭에 사과나무를 심고 평문이 와 애똥밭, 새 또랑 밭까지 점차 사과, 배를 심었다.

한때 둘째 오빠가 경영했던 사업 규모가 제법 크게 번창했다. 막내 오빠가 신제품을 만드는 개발실에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시로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자식 하나 중에 고향을 지킬 놈도 있어야지 다 도시 바람 묵으면 되겠냐 하시며 반대하셨다. 한 참 바쁠 때 오셔서 과수원 한 바퀴 둘러보고 혀를 끌끌 차셨다. 제일 몸도 약한 아들이 농약 통을 짊어지고 이 밭 저 밭 다니는 모습이 짠했다.

옛날 같으면 머슴 두 세분 두어야 할 일을 체구도 작은 막내며느리까지 과수원에 매달려서 일하느라 아이들까지 고생했다. 돌바 줄 사람이 없으니 사과 밭고랑에 아이들을 누워 놓고 일을 했다. 혹시나 비암이라도 나오면 어쩔끄나 하시며 안타까워하셨다.


(재작년 수확을 앞두고 수해로 물에 잠겨서 베어 낸 후 다시 심은 사과나무)


가을에 수확한 사과와 배를 보내주시면 아들 며느리가 뼈를 깎아 농사지은 것이라고 아껴서 드시곤 했다.

휴가철 형제들이 과수원 둘러보러 갔다.

그때마다 버지는 일하는데 방해되니 가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도 부모님 계시니 우리 형제들과 친척들은 당연히 고향집으로 모여들었다.

체구도 작은 막내올케가 과수원 농사짓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먹거리를 풍성하게 해 놓았다. 어찌 그 일을 감당하고 살았을까 올케언니에게 미안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형제들이 모이는 날에는 밥을 사 먹기로 했다.

그래도 먼저 수고해야 할 사람은 고향에 있는 올케언니와 막내오빠이다.

조금이나마 일손을 덜어주려고 반찬거리 각종 양념을 챙겨서 가지만 올케 언니가 반찬과 과일 나물까지 챙겨서 냉장고에 넣어놓았다.

부산에 계시는 둘째 오빠와 올케 언니는 막내 작은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를 부모님처럼 챙기신다. 이번 아버지 기일에도 두 분을 모시고 오셨다. 요양 4등급 받으시고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는 작은 아버지께서는 월남 참전용사이시다.


카메라가 귀하던 시절 사진도 찍어주고 용돈도 잘 주셨고 우리 눈높이에서 잘 놀아 주셨던 분이시다. 작은 어머니께서도 몸이 성치 않으신데 끼니마다 나오셔서 잔 일을 도와주셨다. 잠자리가 불편했지만 각자 알아서 잘 주무셨다.




가족이 모이면 섬진강 주변에서 끼니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가져간 반찬, 올케가 미리 만들어 놓은 음식이 많아서 매끼마다 집에서 밥상을 차렸다. 산에서 채취한 두릅, 취나물 빠질 수 없는 쇠고기와 싱싱한 포기 상추등 매끼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종갓집이라 제사가 많았다. 그래서 다들 떡을 좋아한다. 형부랑 같이 대부도에 바람 쐬러 간 언니가 해풍 맞고 자란 쑥을 직접 뜯어서 삶아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다.

그 쑥으로 절미 만들어서 거실 한쪽에 두었더니 다들 한입씩 먹고 다녔다.


추도예배는 둘째 오빠 인도로 드렸다. 살아생전에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이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 보라고 하셨다.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추운 겨울 섬진강 강바람을 맞고 학교 다닐 딸을 생각해서 짙은 감색 오버를 사다 주셨다. 에이라인으로 살짝 허리가 들어간 멋쟁이 오버였다.

그 추억이 새롭다.

언니는 아버지께 옷 한 벌 해드렸더니 전화하셔서 니기들 한 달 동안 손구락을 빨던지 장만 빨고 살아야다 .

고맙다는 말을 역으로 말씀하셨다.

무서웠던 아버지였지만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으니 그리움에 울컥울컥 해진다.




종손, 종부가 따로 없고 지금은 고향을 지키는 형제가 종손이 되었다.

먼저 서둘러서 이 세상을 떠나신 큰 오빠도 막내오빠에게 미안하다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십여 년 전 군대제대하고 과일나무를 심었던 막내오빠 덕분에 우리 형제들에게는 아직도 찾아갈 고향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오빠는 그 선택에 만족하고 있을까?


아버지 산소 저편 섬진강변에는 철쭉이 불타고 있다. 도로에는 수많은 차들이 오고 가고, 철길에는 KTX가 달리고 산에는 지금 제일 예쁜 초록물결이 흐르고 있다. 좋은 계절에

가신 아버지 선물이다.


# 아버지 기일 # 산소 # 섬진강변 # 메타스퀘어 길 # 막내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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