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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과 셋째 오빠

by 진주

동네가 형성되기 전부터 마을 어귀에 큰 정자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사백 년 정도 되었다는 정자나무는 한 여름철 원한 그늘막 되어주었다.

무더운 여름 철 우리 동네 어르신들의 휴식처인 동시에 아고라 광장이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나온 손자, 손녀들도 그늘막에서 땅따먹기, 공기놀이, 사방치기, 딱지치기하며 놀았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이 정자나무와 함께 자라고 얽힌 추억도 많다. 설이 지나고 보름이 되면 정자나무 큰 가지에 그네를 달았다.

언니들의 울긋불긋한 치맛자락이 창공을 차고 나와 앙상한 가지에 수를 놓으며 날랐다.

셋째 오빠는 어린 동생이 혼자 그네를 탈 수 없자 목마 태다.

발을 몇 번 구르자 언니들처럼 창공을 랐다. 신이 나서 묘기를 부리며 멀리 있는 나뭇가지도 꺾었다.




정자나무 그늘이 반이나 내려와 있는 논에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짚 벼늘을 쌓았다.

나락 벤 밑둥이가 줄을 치듯 남아있는 자리에 납작한 큰 돌로 사방 어귀에 놓아두면 논바닥이 야구장이 되었다.

정자나무 등지고 짚 더미 비스듬히 기댄 채 가오리 연을 하늘 높이 띠우는 남자 친구들도 있었다. 연자새로 실을 풀고 당기며 하늘로 올려 보낸 연이 끼니때가 되면 다시 실을 감아 내렸다. 하늘에서 팔랑팔랑 춤추던 가오리가 흐느적흐느적 내려왔다.

정자나무 높이까지 날아가려고 그네를 메었던 가지는 오랜 세월로 한쪽 가지가 찢어졌다. 명절 때마다 그네로 몸살을 겪고 마침내 찢어진 건 아닐까? 정자나무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다.

그런데 이제는 전각이 멋지게 지어져서 정자나무랑 같이 서 있다.

오랜 세월 우리들의 쉼터가 되어준 정자나무 올해도 어김없이 초록으로 단장하며 그늘을 만들 주고 있다.


영농에 관심이 많았던 셋째 오빠는 고등학교 때부터 닭 삼백마리 키웠다. 오빠 덕분에 계란이 흔치 않았던 시절 도시락 반찬으로 입을 호강시켜 주었다.

읍내 사시던 고모할머니 집에 절름발이로 태어난 젖 염소가 있었다.

학교 마치면 항상 고모할머니 집에 들러서 정성껏 간호했다. 결국 오빠 몫이 되어서 염소를 안고 왔다. 그 염소가 잘 자라서 주전자로 하나씩 우유를 공급해주기도 했다. 끓여서 마시기도 했지만, 비위가 상해 잘 마시지 못했다. 우리 집 젖 염소 덕분에

동네에서 젖이 부족한 아이들이 먹고 자랐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우리 집 킴벨리 포도가 까맣게 익었다. 일에 한 번씩 포도 수확한 후 포도송이를 상, 중, 하로 나누어서 나무상자에 담았다.

셋째 오빠는 여수 공판장에 내다 판 첫 수확으로 주름진 예쁜 원피스 사다 주었다.

집에서 만들어 준 원피스만 입다가 기계주름진 원피스 입으니 딴 사람이 되었다.

포도 수확이 끝나갈 무렵 오빠는 군 입대 했다.



마지막 군대 휴가 나오던 날 오빠는 주유소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무거운 책가방도 들어주 인적이 드물 때는 중학교 삼 학년인데도 업어주었다. 월남전이 예상외로 종전이 되지 않아 오빠 제대가 늦어졌다.

그 사이 군복무 중 임진강 부근에서 동료의 부주의로 새파란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 떠났다.




올해로 셋째 오빠가 우리 곁을 떠난 지 50여 년이 되어간다. 푸른 군복 입고 지금도 군용 쌕 메고 향 집 대문 열고 성큼성큼 들어설 것만다.


지금 학교 오고 가던 신작로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현충원에 오빠 이름 석자기 올려져 있다.

"권 삼택"


** 이 나라 위해서 피 흘려 돌아가신

그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하늘나라

위로를 전합니다.**


# 셋째 오빠 # 그네 # 연 띄우기 #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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