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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 전화기와 어머니의 전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by 진주

행정전화 한 대뿐이던 시절, 마이크 소리에 마을이 술렁이고 어머니가 고무신을 꿰차고 뛰어가던 풍경.
편지에서 삐삐, 그리고 지금은 카톡까지—
세월이 흐르면서 바뀐 건 통신 방식뿐
그 속에 담긴 마음만은 여전히 따뜻합니다.
그 시절,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던 사랑의 방식들을 돌아봅니다.


처음으로 산골짜기 우리 동네에도 전화선이 연결되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각 마을마다 행정전화 한 대씩 마을회관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읍내만 나가도 부잣집은 전화기 손잡이만 돌려 친구들과 대화하는 게 부러웠는데,
우리 동네에도 전화기가 들어오다니,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날마다 전화기 앞에 앉아 대신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마을회관 앞에서 막걸리와 자잘한 생필품을 팔던 구판장 사장님이 전화까지 도맡아 주셨다.
톡톡톡, 마이크를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낮 마을을 울렸다.

“에에에~ 2반에 사시는 공떡 딸, 전화 왔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연이어 두 번씩 울려 퍼지는 마이크 소리에 동네가 술렁였다.

“아잉, 먼 전화가 그리도 왔단가? 동네 창피허다, 다 큰 가시내한테 무슨 전화여!”

이런 구박 섞인 농담이 오가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편지만 주고받던 우리 또래에겐 신세계가 열린 셈이었다.
어르신들도 객지에 나가 있는 자녀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나 논밭으로 일 나가신 분들은 전화 받을 수 없었기에, 전화가 와도 허탕치는 경우가 많았다.
몇 번이나 “2반 공떡댁, 부산 아들 전화 왔습니다” 해도, 목소리는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깍끄막에 사시는 분들은 마이크 소리 듣고 헐레벌떡 뛰어오다 고무신이 미끄러져 앞코가 쭉 찢어지기도 했다.
엄복동 선수처럼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아오는 어르신도 계셨다.
허름한 남방이 땀에 젖어 가슴에 착 달라붙고, 등 뒤로는 자락이 펄럭이며 땀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시외전화 요금은 만만치 않아 자주 통화할 수도 없었다.




결혼 후, 나는 삼 년 동안 시골에서 살았다.

시댁은 "면" 단위라 그나마 조금 나았다.
우체국, 면사무소, 농협 등 관공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국은 따로 없었고, 우체국에서 교환원이 전화선을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시어머니는 성격이 급하셨다. 양조장을 경영하셨기에 전화할 일이 많았는데,
손잡이를 돌려도 연결이 안 되면 금세 전화기를 내려놓고 고무신을 신고 우체국으로 뛰어가셨다.
알고 보니, 전화 교환원이 전화를 늦게 연결했다고 혼을 내러 가신 것이었다.

그렇다고 인심이 야박한 분은 아니셨다. 맛있는 음식만 있으면 이웃에 나누시길 좋아하셨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머니는 아침밥을 마치자마자 첫차를 타고 시장에 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셨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는 또 전화기를 돌렸다.
“댓골 떡, 오늘 시장 갈라요? 나도 지금 나갈라 하그만, 얼릉 나오쇼이.”

오전 11시쯤이면 어머니 일행 몇 분이 짐을 나눠 들고 돌아오셨다.
그중 누구라도 갈치꼬리 하나라도 안 사면 우리만 먹으려니 걸린다며,
저녁밥상 차릴 즈음 갑자기 전화기를 돌리셨다.

통화가 안 되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또 바삐 신을 신고 나가셨다.
어머니는 전화를 걸어 사람을 부르는 것보다, 직접 데리러 가는 게 더 속 시원한 분이셨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끼리만 식사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늘 이웃 누구라도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았다.




자녀들에게 전화하실 때도 순서를 벽에 적어놓고 차례대로 하셨다.
그런데 가끔 순서를 헷갈리셔서 딸에게 전화해야 할 자리에 아들에게, 혹은 그 반대로 하신 적도 있었다.

딸이 전화를 받으면,
“니가 왜 거기서 나오냐고!” 하며 호통을 치셨다.

그래서 형제들이 모이는 명절이면, 시어머니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곤 했다.
요즘도 어느 가수의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노래를 들으면,
그 시절 어머니의 전화 소동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살아계셨다면, 제목 표절했다고 가수한테 쫓아가셨을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전화 신청을 해도 몇 개월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개통되었고,
시골은 더 낙후되어 80년대 초반에도 마을마다 행정전화 한 대가 전부였다.

그러다 전자식 전화기가 보급되며 가정집에도 몇 주 안에 전화기가 설치되었다.
이후에는 삐삐 시절이 도래했고, 지금은 핸드폰이 일상이 되었다.

친구들과 손편지를 주고받던 그 설렘도 사라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리고,
학교에서 돌아와 내 이름으로 온 편지를 꺼내 읽던 그 시절.
차곡차곡 쌓인 편지를 상자에 넣고, 꺼내 다시 읽으며 웃고 울던 그 순간들.
지금 아이들은 상상이나 할까.

이제는 전화도 없이, 핸드폰 메시지 몇 줄로 소식을 전한다.
요즘은 자신의 글보다 건강이나 생활 정보 등 좋은 글을 퍼 나르기에 바쁘다.
그러나 글이 길면 지루하다고 카톡도 읽지 않는 시대다.

그런데 나는 시대를 거슬러, 이렇게 옛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다.
누가 읽을까? 그래도 우리 세대는 읽겠지, 하는 작은 기대를 안고 말이다.

6070 세대는 이렇게 살았다.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어, 오늘도 나는 끄적이고 있다.




카톡 알림음이 또 울린다.
“잘 지내시지요? 다음 주일 1부 예배 마치고 식사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요.
1부 예배 후가 힘드시면 2부 후도 괜찮습니다.”

예전 같으면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정했을 약속도
이제는 카톡 한 줄이면 끝이 난다.
참 편리한 시대다.

그리고 곧 또 한 통의 문자.
우리 집 바로 앞에 살던 국민학교 동창의 어머니께서 소천하셨다는 부고였다.
지난 여름휴가 때만 해도 목욕차가 집 앞에 대기해 있었는데…


전화 한 통에 마음이 오가고, 편지 한 장에 계절이 담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조용한 울림을 다시 꺼내어, 오늘도 기억해봅니다.


* 공떡( 고흥댁) 줄임말

남의 집이나 가정을 높여 부르는 말.

주로 시골에서는 "댁"을 떡으로 많이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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