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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선생님! 언제 다시 오시렵니까?

베이붐 시대 태어난 우리들은 선생님이 곧 우주였다.

by 진주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전근 가고 오신 선생님들로 술렁거렸다.

우리 학교는 섬진강을 끼고 있는 곳이라 선생님들이 배를 타고 떠나가시고 배를 타고 들어오셨다. 특별히 전근 가신 선생님들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 있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한 분 한 분 구령대에 올라서서 작 별 인사를 했다.

선생님이 떠나가실 때면 전 교생이 운동장에서부터 섬진강까지 짝꿍과 함께 마주 보고 서 있는 길을 걸어가셨다. 마지막 선착장에서 서 있는 우리들에게 담임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고 손을 잡기도 하셨다. 배를 타고 떠나시는 선생님을 향해 뽕짝으로 이별가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어디로 가시나요 섬진강 물새도 슬피우는데 저희를 두고서 가시렵니까 나룻배 타고 가면 언제나 오시나요"

이 노래를 부르며 학생들과 선생님도 울었다. 천천히 나룻배가 물살 가르며 떠나갈때면 선생님도 손수건을 흔들어주었고 건너편 선착장에 닿을 때까지 우리들도 눈물 훔치며 손을 흔들었다.

동화 속 이야기 같지만 196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우리 세대들은 선생님 제일 무서워했고 한편으로 존경했고 헤어지면 또 슬퍼서 울었다.




추운 겨울 제대로 씻지 못한 우리들은 새까맣게 손등에 때가 끼어 손이 벌어져 피가 흐르기도 했다. 봄 볕이 따뜻하게 내리 쬐이는 날이면 학년 별로 때를 벗기려 섬진강으로 나갔다. 가장자리 얕은 곳에 들어가서 손과 발을 담그고 때를 불리기 시작했다. 짓궂은 남학생들은 벌써 물 장난치느라 옷이 다 젖기도 했다. 때가 불리면 맨들 맨들한 돌을 하나씩 들고 손과 발에 낀 때를 벗기기 시작했다. 쎄 게 문질러서 살갗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깨끗이 때를 벗기고 난 후에 크림이라도 발라야 하는데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벗긴 손과 발에는 희끗희끗하게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크림 대신 참기름과 들기름으로 바르고 온 친구들 덕분에 수업시간 내내 꼬순내가 풍기기도 했다.




가정방문 오신 날은 동네 학부형들이 모여서 선생님 대접 할 밥 한 끼 준비하느라 다들 바쁘셨다. 한 집에서 음식 준비하면 학부모님들은 바가지에 달걀 몇 개, 마른 명태, 푸성귀, 등을 챙겨서 오셨다. 점심한 끼 잘 드신 선생님께서는 얼굴에 약간 취기가 도셨다. 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를 들고 들길 걸어가신 선생님 배웅하느라 뒤 따라가면 어서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스승의 날! 5학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제법 그때만 해도 철이 들었나 보다.

남자 반장과 여자 부반장이 우리 반 전체 학생들에게 오원씩 돈을 거두었다. 그나마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그냥 지나가기도 했다. 수업이 끝난 후 배 타고 십리 길 걸어서 몇몇 친구들과 오랜만에 읍내를 나갔다. 장날도 아니어서 어디에서 사야 할지 몰라 읍내 한 중앙 통을 몇 번이나 걸어 다녔다. 마지막으로 여우내에 자리 잡고 있는 옷가게 들렸더니 마침 그곳에 메리야스가 있었다. 다음날 종례시간에 선생님께 드리자 뒤돌아서서 윗옷을 훌러덩 벗으시더니 새 메리야스를 갈아입었다. 하얀 메리야스만 입은 선생님은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좋아하셨다. 어린것들이 읍내가 먼데 그곳까지 가서 샀느냐고 꾸중하면서도 너무 좋아하셨던 선생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쁜 보리가실이 시작되면 삼일정도 농번기 방학이 시작되었다. 누렇게 익은 보리를 베고 나면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보리 타작하는 타맥기 소리가 새벽까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번번한 기계가 없던 시절이라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이때 초등학교 다니는 우리 세대들은 동생들 돌보느라 농번기 방학이 끝나도 결석하는 친구들이 많아 군데군데 자리가 비었다. 이때 선생님께서는 또 결석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이 마을 저 마을 자전거 타고 가정방문 다니셨다. 동생 업고 와도 괜찮으니 꼭 학교는 결석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내 마음은 풍금”에서 전도연 씨가 동생 업고 학교에 온 것처럼 우리 친구들도 동생들을 업고 왔다. 교실 맨 뒤 공간을 넓게 하기 위해서 그때는 교탁 바로 앞까지 책, 걸상을 옮겨놓았다. 그 뒤에서 칭얼거리는 동생을 업고 달래 가며 잠을 자면 포대기를 깔아 눕히고 공부했다. 사교 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동생을 업고 논, 밭으로 가서 젖을 먹이고 돌아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오후 수업은 참석하지 않는 친구도 있었다.




여름, 겨울 방학이 되면 읍내로 아기 돌보러 가는 친구가 방학이 끝나도 학교 오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또 그 친구들을 위해 가정 방문 다니셨다. 방학이 끝났으니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학교를 보내달라고 학부모님께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졸업장이 밥 먹여준다요 지금 목구멍이 포도청인디 하셨지만, 장날 애기 보는 딸을 데리고 와서 다시 학교 보냈다.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우리 세대들은 학교를 다녔다.

부모님들도 선생님들을 하늘(?)처럼 받들었다.




들은 이야기이지만 날아가는 새도 떨어 트린 다는 권세가 대단하셨던 분 아들이 학교 입학 했다. 아버지 앞에서 모든 분들이 굽신굽신하는 모습만 보아 왔던 아들이 선생님도 우습게 여겼다. 아들 버릇을 가르치기 위해 선생님을 초청했다. 아침부터 집안 청소 하고 대문까지 닦은 것을 보고 아들이 물었다. 오늘 우리 집에 누가 오시느냐고 그러자 아주 높은 분이 오신단다. 깍듯이 모셔야 된다고 하셨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신 분이 나중에 보니 자기 담임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초석을 깔아놓고 큰 절을 올리며 선생님을 맞았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아들이 우리 아버지보다 선생님이 더 높은 분이시네 했다고 한다.




베이 붐 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부모님 보살핌을 다 받을 수 없었다. 전적으로 학교 선생님을 의지하며 말을 듣지 않으면 회초리를 아끼지 말라고 부탁하셨다.

지금 가정에서는 아버지 자리가 무너지고 학교에서는 선생님 자리가 무너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무너진 아버지 자리, 교권이 다시 세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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