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과 박물관을 다녀와서
우간다로 아웃리치를 떠나는 올케 언니 배웅 차 오빠도 인천공항에 왔다. 배웅이라기보다, 선교 물품이 너무 많아 오빠의 도움이 필요했다.
출국 절차를 마친 후 비행기 탑승을 도와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자정을 넘겼다. 칠십 대 중반이지만 열정만큼은 청년처럼 살고 있는 오빠와 올케 언니이다. 모쪼록 검은 진주 속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열매 맺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튿날 오빠랑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기로 했다.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자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우리를 맞이했다. 미군기지로 사용했던 장소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이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간 관계상 구석기시대부터 신라 시대까지의 유물만 관람했다.
구석기 시대의 손도끼, 빗살무늬 토기에서부터 신라의 금관과 귀걸이까지—그 시대 사람들의 손끝에 깃든 삶과 예술이 눈앞에 펼쳐졌다.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통해 현재를 사는 우리가 수천 년 전의 조상들을 만났다.
박물관을 나오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 집에도 박물관이 있다면 어떤 전시품이 놓여 있을까?
여섯 살 되던 해, 상 할머니께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다. 요란한 꽃상여 앞에는 피노키오처럼 생긴 나무 인형이 두 팔과 다리를 번쩍이며 앞장서 있었다. 무슨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상 할머니 제삿날만 돌아오면 팔촌 형제들까지 모여 제사 음식을 장만했다. 또래들이 많아 음식 장만에 방해가 되자, 방학을 맞은 둘째 오빠가 우리를 담당했다. 그때 오빠에게 배운 노래가 슈 탐슨(Sue Thompson)이 부른 팝송 'Sad Movies (Make Me Cry)'였다. 1960년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노래라고 한다. 배웠어도 "oh oh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 이 구절밖에 모른다. 잘 따라 부르지 못하면 오빠는 빗자루를 들고 한 대씩 때리곤 했다. 겨우 한글을 깨쳐 교과서 읽기에 바쁜 우리들에게 팝송은 무리였다. 우리와 함께 살았던 사촌, 육촌 형제들까지 추억의 박물관에 쌓여 지금도 그때 이야기만 하면 즐겁다.
음식 장만이 끝나면 생선, 나물, 떡, 콩나물국, 과일, 전 등을 접시에 담아 광주리에 이고 이 집 저 집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골목골목 다니며 음식 나누는 일이 재미있었다. 서로 가겠다고 다투자, 한집에 둘씩 짝을 지어 보내주었다. 골목길을 오르다 엎질러서 콩나물국이 마른반찬이 되기도 했다. 다음 날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했다. 육촌 형제들까지 한 줄로 줄을 세웠다. 간밤에 제사상에 차려진 갖가지 음식을 함지박에 거두었다.
아침이 되면 할머니께서 하나씩 골고루 나누어주셨다. 학교 가기 바빠서 자기 몫은 각자 숨겨두었다. 먼저 집에 도착한 나는 오빠 몫을 훔쳐 먹다 들켰다. 도망가다 넘어져 지금도 무릎에 흉터가 있다.
밥만 굶지 않고 살았던 집안이라 특별히 패물이나 노리개를 남겨놓은 것은 없다. 기억하기는 담배통, 놋 재떨이, 곰방대, 돌하루, 축음기, 아코디언, 한산모시 등이 있었다.. 붓글씨로 엮었던 책을 물에 빨아서 풀을 먹인 바가지가 튼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제강점기 때 다 뺏기고 겨우 숨겨 두었다가 남긴 11첩 반상기 놋그릇 세트가 지금도 다락에 있다.
놋대야, 놋 양픈 놋다라이, 놋 국자등
상할머니 막내딸인 고모할머니께서 처음으로 상할머니에게 아이스케키를 사주셨다. 처음 맛본 맛이
시원하고 달짝지근해서 신세계였다.
막내 오빠가 수술하고 누워있었다. 손주를 주고 싶은 마음에 케키 하나를 사서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쌌다. 십리길도 넘은 길을 걸어왔다. 역전쯤 걸어오자 줄줄 녹아서 대만 남았다는 이야기는 우리 집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다. 또 한 가지, 괘종시계를 처음 보았다. 시간마다 땡땡 치자 그 시계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시계가 멈추자 고모할머니께서는 딸들에게 "밥 줄 때가 됐는가 보다, 나중에 밥 좀 줘라"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주려고 시계를 열어보니 밥 한 숟갈이 들어 있었다. 상 할머니께서 "니그들이 바쁜 게 내가 밥 줬는디 시계가 안 간다" 하셨단다. 상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추억은 밥상머리에서 우리를 많이 웃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집의 소중한 박물관이 되었다.
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상할머니를 기억하며 떠올리는 유년의 정서적 풍요가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준다. 우리가 살아온 시절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두면, 후손들은 “그땐 이렇게 살았구나” 하며 미소 짓겠지. 불과 몇십 년 전 이야기지만,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언젠가 우리의 아날로그 일상이 박물관 속으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머리에 흰 눈이 희끗희끗 앉은 형제들과 박물관을 돌고 나니 다리가 아팠다. 팔십을 바라보는 둘째 오빠가 가장 건강했다. 언니와 나는 쉴 곳을 찾아 헤매다 겨우 식당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맏언니답게 오빠에게 몇 주간의 밑반찬을 챙겨왔다. 콩자반, 멸치조림, 무생채, 그리고 얼음 대신 식혜를 얼려 담은 센스까지.
“집에도 언니가 해놓고 간 반찬이 많다” 하시면서도 오빠는 동생이 싸준 반찬 보따리를 소중히 들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가족 단체방에 사진 몇 장을 올리자 아들이 말했다.
“형제분들끼리 보기 너무 좋네요. 그런데 시골 삼촌이 안 계셔서 좀 서운하네요.”
사과 과수원을 하는 막내 오빠는 지금 막바지 가을 햇살 아래 빨갛게 물드는 사과밭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 형제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박물관이 쌓였다. 시간은 흘렀지만, 그 안의 추억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