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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Oct 31. 2023

우리 집 박물관 이야기

형제들과 박물관을 다녀와서

우간다 아웃리치를 떠난 올케 언니 배웅차 오빠도 인천공항에 오셨다.

배웅보다 아마 선교 물품이 많아 오빠 힘이 필요해서 같이 오셨을 것 같다.

출국절차를 끝내고 언니 비행기 탑승을 도와주고 집에 오시는 시간이 자정  12시가 넘었다.

칠십 대 중반이지만 열정만큼은 아직도 청년처럼 살고 있는 오빠와 올케언니이다.

모쪼록 검은 진주 속에 복음 씨가 뿌려져 열매 맺길 간절함으로 기도한다.


오빠는 늦은 나이에 그림으로 예수님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서울 인사동거리나 박물관 전시회 관람을 자주 하시는 편이다. 이번에도 오신 김에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하신다고 한다. 오빠 덕에 우리도 박물관 구경을 하고 싶었다.  먼저 시내에 나가 계시는 오빠와 함께 만날 약속하고 언니랑 함께 용산으로 향했다.     

박물관 입구에 도착하자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우리를 맞이했다. 미군기지로 사용했던 장소가 평택으로 이전하고 이곳이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지어 현재 이르고 있다, 시간 관계상 구석기시대부터 신라 시대까지 유물들만 관람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구석기시대 손도끼, 빗살무늬 토기 항아리 등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나 무덤 벽면에 그림을 통하여 그 시대의 문화와 예술을 엿볼 수 있었다.      


신라 시대에도 금속, 보석, 유리, 진주 등 다양한 소재로 만들어졌다. 장식은 다양한 디자인과 스타일로 제작되어 종교적 의미나 예술적인 표현을 담고 있다.


고구려 무덤에서 발견된 장신구들은 고구려 왕국의 고려인들이 혼례, 장례,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다양한 장신구와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덤에서 발견된 장신구들은 고구려 문화와 예술, 종교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백제 무덤에서 발견된 장신구들은 백제 시대의 생활, 종교, 예식, 예술 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백제인 귀걸이 모양을 통하여 동북아시아와의 문화교류를 볼 수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물품을 통하여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몇 천 년 전의 조상들을 만났다.     


 우리 집 박물관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섯 살 되던 해  상 할머니께서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추운 겨울에 돌아가셨다.

요란스러운 꽃상여 앞에는 제법 큰 피노키오처럼 생긴 나무 인형이 두 팔과 두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고 있었다. 무슨 주술적인 의미가 있었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상 할머니 제사만 돌아오면 팔촌형제들까지 모여서 제사 음식을 장만했다.

또래들이 많아서 음식장만 하는데 방해가 되자 둘째 오빠가 방학을 맞이해서 우리들을 담당했다. 그때 오빠에게 배운 노래가 Sad Movies (Make Me Cry)  새드 무미 팝송이었다.

(Sue Thompson 슈 탐슨)이 부른 노래로 1960년대 전 세계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노래라고 한다.

배웠어도 "oh oh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 이 구절 밖에 모른다.

잘 따라 부르지 못하면 빗자루를 들고 한 대씩 때려주었다. 겨우 한글 깨쳐서 교과서 읽기에 바쁜 우리들이 팝송은 무리수였다.  우리랑 함께 살았던 사촌, 육촌 형제들까지 추억의 박물관에 쌓여서 지금도 그때 이야기로 만나기만 하면 즐겁다.


 음식 장만이 끝나면  생선, 나물, 떡, 콩나물 국, 과일, 전등 접시마다 담아서 광주리에 이고 이 집 저 집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골목골목 다니며 음식 나누는 일이 재미있었다.  서로 가려고 하자 한집에 둘이 짝을 지어서 보내주었다.  골목길을 오르다가 엎질러서 콩나물국이 마른반찬이 되기도 했다.  다음날 일가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했다. 우리들은 한 줄로 줄을 세우고 할머니께서 종류마다 하나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학교 가기 바빠서 자기 몫은 각자 숨겨두고 학교 다녀왔다. 먼저 집에 도착한 나는 오빠 몫을 훔쳐 먹다  하루는  들켜서 도망가다 넘어져 지금도 흉터가 있다.


밥만 굶지 않고 살았던 집안이라 특별히 패물이나 노리개를  남겨 놓은 것은 없다.

담배통, 놋재떨이. 곰방대. 돌하루 등

한산 모시정도 가장 좋았던 것 같다.

읍내 사는 막내딸  나에게는 고모할머님 집에 가셔서 처음으로 아이스케키를 드셨다.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맛이 신세계였다. 막내오빠가 수술하고 누워있었다. 손주 주고 싶은 마음에 케키 하나 사서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쌌다.

걸어오다 보니 줄줄 녹아서 대만 남았다는

이야기는  우리 집 내려오는 전설이다.

또 한 가지  괘종시계를 처음 보았다. 시간마다 땡땡 치자 그 시계 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시계가 죽자 밥 줄 때가 됐는갑다  나중에 밥 좀 줘라 고모할머니께서 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중에 주려고 시계를 열어보니 밥 한 숟갈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 왈   "니기들이 바쁜 게 내가 밥 줬는디 시계가 안 간다"  하셨단다.

우리들은 밥상머리에서 상할머니께서 남겨주신 추억으로 많이 웃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집 박물관이 되었다.




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상 할머니 기억하며 유년떠올리며 그때 누렸던 정서적인 풍요로움이 현재를 살아갈 때도 힘이 된다.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 시시껍쩍한 이야기를 글로 남겨놓으면 나중에라도 우리 후손들이 그때는 이렇게 살았구나 하지 않을까 ?

불과 몇십 년 전 이야기지만 하루 아니 시간 시간 다르게 변하고 있다. 고양이 눈알 변하듯 변하는 시기에 아날로그를 버리지 못한 지난 이야기가 나중에는 박물관이 될 날이 올 것이니까     

머리에 흰 눈이 희끗희끗 앉자 있는 형제들을 만나 박물관을 돌고 나니 다리가 아팠다.

팔십을 달려가고 있는 둘째 오빠가 그래도 제일 건강했다. 언니랑 나랑 다리가 아파서 앉을자리만 찾았다. 겨우 우리가 편하게 쉴만한 식당을 찾아서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올케 언니가 우간다로 아웃리치를 떠나자 몇 주간 혼밥 할 오빠 생각하며 역시 맏언니답게 밑반찬을 해왔다.  콩자반, 멸치조림, 무생채 센스 있게 얼음 대신 식혜를 얼려서 담아왔다. “집에도 언니가 해놓고 간 반찬이 많다” 하시며 그래도 동생이 해준 반찬 보따리를 들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사진 몇 장 가족 카톡 방에 보냈다. 아들이 "형제들끼리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그런데 시골 삼촌이 안 계셔서 좀 걸리네요" 라고 답장이 왔다.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오빠는 요즘 늦은 가을 햇살로 막바지 빨간빛으로 물들이는 사과밭을 돌보는 중이라고 한다.


오늘 우리 형제들에게 박물관이 하나 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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