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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Jun 15. 2024

보리단이 타고 있어요

(고흥댁 열한 번째 이야기) 일손이 부족해서

후끈한 열기가 뺨을 스친다.

보리수염은 햇볕에 바스러질 듯 하늘로 빳빳하게 성난 듯 세우고 있다.

이슬비라도 내리면 불타는 땅이 숨을 쉬련만.




보리가실 때는 일손이 항상 부족하다. 보리 베고 난 후 바로 그 논에 쟁기질하고 물 대서 써레질까지 하고 난 후 모내기를 한다. 부지깽이도 한몫한다는 이때에 공떡은 궁리 끝에 건너편에 사는 삭동아짐 집으로 달려갔다. 한창 사춘기가 발동을 해  말썽 부리던 아재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들께도 먼저 이야기했더니 참말로 어찌 그런 의견이 나왔소 어쩌게 든 공떡이 주리를 틀었응께 잘 해보소잉 공떡만 믿을라요"

세 놈이 어울려서 놀고 있는 정자나무 그늘로 찾아갔다.

아재! 같이 노는 친구들이랑 우리 새 정제 보리 좀 베주면 좋것는디.

요새 어찌나 햇볕이 뜨겁던지 보리가 볶아지게 생겼어 오늘 안 베면 보리 모가지 다 떨어지것그만.

새 정제 보리만 베주면 싹도 후하게 주고 새참도 맛나게 빵 쪄줄랑께.



 

공떡은 미리 밀가루에 막걸리를 붓고 간해서 부풀렸다. 장독대 위에 놓아둔 반죽이

햇볕에  한껏 부풀어 큰 함지박에 넘쳐났다. 주걱으로  몇 번 저어주자 때왈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을 먹고 뒤안에 솥을 걸고 저녁 내내  술빵을 쪄냈다.

송송 구멍 뚫린 빵은 손으로 몆 개를 뜯어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부들부들한 빵을 바구니에  하나 가득 쪄놓고 잠깐 눈을 붙였다. 약속은 했지만

정말 아침이 되면 올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머리가 덥수룩한 세 친구가 대문을 들어섰다.

참말로 우리 아재들이 최고네 평상시 과묵했던 공떡이 유난히 호들갑을 떨며 맞이했다.




막내 오빠는 군대 가고 같이 일을 도와주던 오빠는 하필 읍내 논에 모내기를 하러 갔던 터였다.

모처럼 나까지 동원이 되어 남은 보리를 베기 위해 새 정제로 향했다.

아버지 와이샤스를 길게 늘어뜨리고 밀짚모자에 수건까지 얹어서

얼굴을 감쌌다. 뜨거운 열기로 숨이 턱턱 막혔지만 어설픈 낫질에도 보리고랑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보리가시는 긴팔을 입었어도 사정없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찔러댔다.

젊은 아재들은 척척 낫질도 잘했다. 훨씬 나보다 앞장서 나갔다.

내가 베고 있는  고랑에도 척척 낫질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리더니 나하고 마주쳤다.




그때  새참을 싸 온 공떡 덕분에  빵과 특별식인 시원한 사이다를 마셨다.

수염이 제법 거뭇거뭇하게 났지만 볼마다 솜털이 아직도 보송보송했다.

그 솜털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자 목에 건 수건으로 닦아냈다. 다들 순수한 아이들이었다.

단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것 때문에 같이 몰려다니다 보니 말썽 부리고 어른들 눈밖에 난 것이다.

지금 공부해야 할 나이에 땡볕에서 보리베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점심도 후하게 차려줘야지 엄마인 공떡에게 단단히 일러주었다.

안 그래도 자들 좋아한 것으로 밥상 차렸다.

감자 볶으고 요새 자들 좋아하는 햄도 사서  계란 입혀서 붙여놓고

감자밑에 깔고  갈치도 지져났은께 입맛대로 묵어~~

하며 주섬주섬 상을 차렸다.



오후에는 얼마 남지 않은 보리를 베고 단을 묶어서 보리단을 쌓기 시작했다.

모내기를 도와주던 오빠가 읍내에서 돌아와 같이 단을 쌓았다.

제법 높이 올라간 보리단을 보며 처음으로 보리베기로 집안에 도움을 줬다는 마음에 뿌듯했다.

아재들이  흘린 땀방울의 결과를 보고  본인들이 더 많이 베었노라고 서로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그 모습들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새 정제 좁은 논길을 걷다 보니 황금물결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모내기를 하려고 쟁기질하는 아저씨들이 소와 함께 땀을 흘리며 이랴! 이랴! 소리쳤다.


가뭄으로 고랑에  물이 마르자 섬진강 양수장에서 발통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린다.

섬진강물을 끌어올리자 고랑을 타고 바짝 마른논에  물이 들어가고 있다.

배고픈 아이 엄마 젖 목구멍에 넘어가는 소리, 자기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배부르다는 옛말이 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또랑물도 물길이 틀어져서 흐르고 있었다.

가끔 서로 물을 대려고 싸울 때도 있었다. 집 앞 논과 솔밭거리 논이 정반대였기에 또랑 물줄기를

어느 쪽을 막을 건지 늘 선두다툼이 있었다.

그래도 집 앞 논이 먼저인 경우가 많았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니  보리단이 다 타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우리 논은 아니겠지 금방 보리단을 쌓고 왔는데,,,

뒤를 돌아보니 새 정제 논에서 불이 났다.

환장하게 진짜 우리 논에서 보리단이 새빨갛게 타고 있었다.

아이고! 저 논이 누 논이여! 공떡 논 아니요?

 바짝 말라 있는 보릿단은 순식간에  타오르며 하얀 기둥을 세우고  올랐다.

새 정제 고랑물이 흘러도  바케스 하나 없는 곳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보릿단을 다 태우고 아직도 아쉬운 듯 또 태울 곳을 찾으며  날름거리고 있었다.

참 허망했다.

아이들 손까지 빌려서 베어  보리가 한순간에 재가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자기들 손으로 베었던 곡식이 잿더미로 변하자 아이들도 누가 불을 질렀냐? 잡아야 해! 하며 핏대를 세웠다.

범인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른다.

옆에서 모내기하던 분들이 더워서 그늘 찾아 보리단을 그늘 삼아  새참을 먹었다.

그리고 엄마 따라갔던 아이들이 그늘진 보리단 밑에서 놀았다.

새참 먹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무심코 던진 꽁초가 불을 낸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공떡이 어디서 왔는지  아이고! 어린 새끼들흐고 우리 딸이 요렇게 더운 날에 흘린 땀이 보릿단 타는 것보다 더 아프다 울부짖었다.  

하루 종일  불덩이를 만들어놓은 태양 서쪽으로 기울며 붉게 타올랐다. 떡이  짖는 소리와 함께 오지리 산속으로

점점 숨어 들어가고 있었다.


* 공떡 - 고흥댁

옛날 결혼한 여자들에게는 댁호를 붙쳐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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