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작품성이 좋은 TV 문학관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튜브를 통해 소장수와 함께 흘러간 50년
최근 유튜브를 통해 80년대 명작 드라마 <TV 문학관>의 '소장수' 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김성겸, 이덕희 주연의 그 작품을 보고 있노니, 문득 빛바랜 앨범 속 사진 같은 여고 시절의 추억이 소환되었습니다.
1970년대, 우리 여학교는 참 엄격했습니다. 남학생들은 단체 관람을 허락받은 영화도 우리에게는 '관람 불가'였지요. 담임 선생님께 항의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늘 거절뿐이었습니다. 결국 몇몇 친구들과 몰래 극장을 찾았다가 들켜서 반성문을 쓰기 일쑤였습니다. 지겹도록 반성문을 쓰다 보니 "덕분에 글짓기 실력이 늘어 감사합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가, 반성문 제출 횟수가 열 번으로 늘어났던 웃지 못할 기억도 납니다.
가장 잊히지 않는 건 여름방학 때 친구들과 몰래 보러 간 영화 <소장수> 사건입니다. 한참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뜨셨다는 정보가 날아들었죠. 간첩 잡듯 들이닥친 선생님을 피해 화장실로 숨어들었습니다.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푸세식 화장실, 바닥에는 살찐 굼벵이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문구멍으로 망을 보며 나가려던 찰나, "냄새나는데 뭐 하고 있냐, 얼른 나오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밖에는 무서운 과학 선생님이 매를 흔들며 빙글빙글 웃고 계셨지요.
그 일로 개학 후 처벌을 걱정했지만, 알고 보니 방학 동안 영화를 보다 걸린 학생이 서른 명도 넘었습니다. 일일이 반성문을 검사하기 힘들었는지 우리는 단체로 교무실 입구 청소를 맡게 되었습니다. 마른걸레로 닦고 양초로 문질러 애벌레처럼 윤기를 내던 우리들, 그 옆을 지나며 선생님들이 툭툭 주시던 꿀밤은 이제 그리운 정이 되었습니다.
당시엔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해 주인공 박노식이 나쁜 사람이고 여주인공이 불쌍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등굣길 읍내 오일장 터에서 만난 소들의 울음소리도 그저 처량하게만 들렸지요. 하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본 '소장수'는 소와 함께 사계절을 걷는 소장수의 고달픈 애환과 사랑을 책임지지 못하는 한 남자의 비극이 절절히 느껴지는 수작이었습니다.
문득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 <길(La Strada)>이 떠올랐습니다. 포악한 잠파노와 순박한 젤소미나의 비극적인 운명처럼, 소장수 만석과 옥분의 이야기도 너무나 닮아있어 마음이 아렸습니다. 뒤늦게 자기가 버린 여자를 찾아 헤매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남자들, 그리고 모진 세월을 견디다 죽어간 여자들…. 그 못된 남자들을 끝내 사랑했던 여인들의 마음이 이제야 더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등산만 가도 반성문을 써야 했던 우리 세대의 이야기는 이제 '박물관'에 소장될 만큼 옛일이 되었습니다. 뽕나무밭이 다섯 번은 변했을 50년의 세월. 교무실 청소를 하며 꿀밤을 주시던 선생님들은 생존해 계실지, 함께 반성문을 쓰던 친구들의 손주들은 어느새 그때의 우리 나이가 되었겠지요.
풍요롭고 자유로운 지금의 세상을 보며, 그 시절 우리가 화장실 문구멍 너머로 보았던 세상은 참 좁았지만 참 뜨거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극장 # 길 # 반성문 # TV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