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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Jun 24. 2024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

고흥댁 열두 번째 이야기


일손이 바쁠 때 다들 숟가락 놓기가 바쁘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엉덩이가 무거운 엄마는 옛날이야기가 누에고치 실나 오듯이 풀어져 나왔다. 그날 저녁도 빨치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이야기는 백세가 다 되어도 어제 일인 양 말씀하셨다.




그날도 어머니는 재봉틀 머리부터 분리시켜 쇠죽 끓이는 뒤 정제 삐득삐득 말라가는 풀더미 속에 감추었다.

여물 써는 작두도 풀 더미에 그냥 둔 채 이만흐면 되것제 하면서도 몇 번이고 풀 더미를 쌓고 또 쌓았다.

재봉틀 몸체는 책상을 만들어서 아들 책을 쌓아놓았다.

농사 지을 때는 소만큼이나  필요한 것이 재봉틀이었다. 겨울철 내내 이웃들 옷 지어주고 일꾼 사서 농사지었다.  

집안 식구들 옷도 직접 만들어 입던 때라

다시없는 재산목록이었다.




얼마 전에는  빨치산들이 들이닥쳐 오봉떡 집  큰 소를 몰고 가버렸다.

빈 마구간을 쳐다보며 올 농사는 어찌께 지을 끄나 차라리 늙은 나를  잡아가제 하며 울었다. 해군사관학교를 다니던 큰 아들도 소식이 끊긴 지 오래돼서 가슴이 타던 때에 농사지을 소까지 빨치산들에게 뺏겼다.

그날도 어머니는 해 질 녘 저녁밥 할 요량으로 어느 때나 다름없이 물부터 길렀다. 뒤꼍에 있는 우물을 긷느라 마당을 몇 번이나 가로질렀다.  물을 나르다가 우연찮게 앞산을 보니  빨치산들이  떼를 지어  몸을 숨기는 모습이 보였다. 앞산 제일 높은 봉우리를 올라서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우리 집 마당이 훤히 보였다.

오봉떡집 소를 몰고 간 후에는  우리 집 소는 무조건 경찰서가 있는 목동으로 끌고 갔다.

그 일은 고등학생인 막내 삼촌이 도맡았다.

다음날 해뜨기 전에 찾아와서 일꾼들에게 소를 넘기고 삼촌은 학교 갈 채비를 했다.




오늘 저녁은 뉘 집을 쳐들어올지 몰라  필요한 것 들을 숨겼다

저녁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삼촌과 큰 오빠, 둘째 오빠는 다락에 숨기고 다락 문고리에는 겉옷을 걸쳐 두었다.  밤이 으슥해지자  마침내 빨치산이 우리 집으로 쳐들어왔다.

여자들은 고추장, 된장, 소금 등 장독대에서  샅샅이 뒤져 자루 속에 쑤셔 넣었다.

빈 소 마구간을 보자 어머니 어깨를 툭툭 쳤다.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다 알고 이 집을 방문했다. 어서 필요한 것을 더 내놓으라고 했다. 퍼뜩 떠오르는 게 닭이었다.

제법 커서 알도 낳은 햇닭이지만 아버지 이름을 부르니 정신이 아득했다. 밤이라 닭들도 소리 없이 잠을 자다 갑자기 열어 제키는 닭장문소리에 퍼드득 거리며 난리가 났다. 푸드덕 거리는  날갯죽지를 사정없이 잡아 무조건 부대에 집어 쳐 넣었다.




신발도 신은 채 방까지 쳐 들어와 옷가지를 챙겼다.

운동회 때 쓸 모자도 무명베로 만들어서 막내 삼촌과 큰아들 모자를 벽에 걸어 두었다.

그 모자를 쓰고 가려던 사람 손을 겁도 없이 붙들면서 모자는 내일 우리 새끼들이 쓸 것인지 놔두고 가면 안 되겠소? 하고 애원하자 머리에 썼던 모자를 몇 번이고 이리저리 보더니 그냥 걸어두고 나갔다.

 그 말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아메 그 사람도 자기 아들이 있응께 그 아들 생각나서 그냥 두고 갔을 거라고 했다.

그때 마침 인솔자 대장이 휘파람을 불자 하던 일을 정리하고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날 밤 겨우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에 어중간하게 눈을 붙이다가 나왔다.

그런데 닭장에서 암 닭 한 마리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그때일이 어제 일인 듯 살아남은 암탉 한 마리 이야기할 때마다 어머니는 반가워서 "아이고 !니가 어쩌게 안 잡혔냐? “

하며 목소리가 커졌다.

말이 통하지 않은 암탉이지만 눈물 푹 쏟아졌다. 뒤안 정제 겨둔 재봉틀 헐레벌떡 가보니 얼마나 밟고 다녔는지 풀 더미가 밟혀서 재봉틀 머리가 나와 있었다.

밤이라 그냥 지나쳤을게다.




한바탕 빨치산이 지나가고 낮에는 경찰이 들이닥쳤다.

혹시나 빨치산과 내통하는 자가 없는지 살피려 온 것이다.

밤에는 빨치산에게 필요한 것들을 뺏겼다. 낮에는 경찰관들에게 거름 간에 숨겨둔 쌀 밥을 지어주었다.

같은 동네 이웃들도 제법 공산주의 사상이 물든 사람들이 있었다.

낮에 찾아와서 "인자 이태도 집에 들어와도 괜찮은 게 들어오라고 하소이" 가끔 찾아와서 상관떡 아들이 회유했다.




아버지는 그때 읍내 고모할머니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터였다.

아들서로  이념이 달라도 어른들은  터놓고 지냈다. 상관떡이 우리 집에 오자마자

할머니는 담배를 내놓으며 속이 얼마나 타 들어가요 하자 속이 타들어가기는 피차 마찬가지지라잉.

 서로 이념이 다른  아들 걱정에 긴 담배대를 놋 재떨이에 털며  깊은 한 숨을 담배연기에 실어 보냈다.   

산사람들이 양식이 떨어지면   우리 동네를 자주 습격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가져갈 짐이 많으면 장정들에게 짐을 지우고 산으로 데려갔다.

얼마 전 사촌아재가 짐꾼으로 끌려가다 다행히 고란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짐꾼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이념이 뭔지도 모른 채  자의든 타의든 영영 내려오지 못했다.




상관 떡집은 빨치산이 들이닥친 적이 없다. 혹시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삼촌, 오빠를 짐꾼으로 데려갈까 무서웠다.

다락에 숨어도 언제 문이 열릴지 늘 두려움에 떨었다.

빨치산이 동네 쳐들어오면 우리 삼촌과 오빠는 아이러니하게 상관떡집으로 갔다.

아들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상관떡은 이웃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추운 겨울에 상관떡 아들이 우리 집을 살피러 왔다가  아버지 외투를 입고 갔다.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동네와 가까운 논두렁에서 총 맞아 죽었다. 하필 아버지  옷을 입고 죽었으니  또다시 경찰 조사가 들어왔다. 전화가 없으니 알아볼 수도 없고

혹시 아버지가 총 맞아 죽은 게 아닌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데 상관떡 아들로 밝혀졌다. 공산주의건 민주주의건 아들이 죽은 것은 다 같이 슬픈 일이다, 빨치산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 통하는 게 있었다. 금줄이 대문에 걸려 있으면 해산 한 집이라고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언니가 1951년생이다.

 언니가 태어날 때도 오랫동안 금줄을 걸어 두었다. 그래서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집 복덩이로 불렀다.




결국 아버지는 부르주아라는 죄목으로 광주 형무소에 갇혔다. 날마다 옥에 갇힌 사람들을 불러낼 때마다 저 사람들은 풀려나는구나 부러다.

옥에 갇혀있는데 어느 날 교도소에 불이 났다.  그때 광주시민들이 모든 연장을 들고 나와 감옥 문을 부수었다.

그때 아버지가 살아왔다. 한 사람 씩 호명할 때마다 그 사람들은 총으로 쏴서 죽였다. 미처 죽이지 못하자 감옥에 불을 지르고 도망을 친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날마다 교도소 앞에서 조카가 혹시 죽지 않을까?

 고모할머니는 그 앞에서 기다렸다.

살아서 돌아온  우리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 넷째 오빠와 자가  태어났다,




결국 지리산으로 모여든 빨치산 소탕 작전이 벌어졌다. 미리 자수를 권하자 손들고 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발에 동상이 걸리고 먹을 것을 제때 먹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떴다. 동상이 걸려서 발이 퉁퉁 부은 사람 중에 발을 잘라내야 했던 사람들도 부지기 수였다. 임신한 몸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얼굴이 부은 여자들도 많았다. 남편이 산으로 간 사람들은 부인들을 족치기도 했다. 남편 어디다 숨겼는지 내놓으라고 무던히도 맞았다고 한다.

이념이 달라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사람들이 한 집안에서 같이 살기도 했지만 원수가 되는 집이 많았다. 할아버지와 사촌 할아버지께서도 일찍 돌아가셔서 우리 집은 할머니들만 계셨다.

일손이 항상 부족한 우리 집은 산에서 내려온 가족 중에 자수하고  농사일 거들며 같이 살았다.




어머니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이념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소나무에 칡넝쿨로 묶어두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굶어서 어느 이름 모를 산골짜기에서 그대로 뼈만 칡넝쿨에 감겨 있었다. 공산주의자들도, 경찰관과 군인아저씨들도 많이 죽었다.

같은 형제끼리 이념이 달라 서로 죽였던 역사상 가장 불행했던 육. 이오가 올해로 74주년이다.

또다시 푸틴이 북한을 방문하고 북한은 오물 풍선을  계속 남으로 띄우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이 땅에 다시 전쟁이 일어날까? 걱정이다.

다시는 형제끼리 싸우는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지 않길 절한 마음으로 도드린다.



6.25 전쟁의 곤고한 환난 가운데 우리나라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숨 바쳐 신앙의 자유를 지킨 호국 선열과 조상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믿는 내가 먼저 나라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의 길을 선택하는 우리 민족이 되게 인도해 주옵소서.

(큐티인 기도하기 에서)


# 빨치산 # 육이오전쟁 # 동족상잔 # 형제 # 소 #재봉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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