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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Sep 20. 2024

촌스럽게 펜션이 처음이라

자녀들이 제 짝을 찾지 못해 결혼이 늦어졌다.

그러다 보니 친정어머니가 백세를 누리는 동안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았다.

시댁도 친정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편리했다. 

시집과 친정을 동시에 오갈 수 있으니 꿩도 먹고 알도 먹었다.




결혼 사십 년 차가 넘어서자 사정이 달라졌다.

결혼 한 아들, 딸이 찾아오니 꼼짝없이 음식장만을 해야 한다.

항상 주 메뉴는 팔보채, 잡채, 삼색전, 우엉 전, 동태 전, 갈비, 나물종류이다.

김치는 미리 일주일 전에 담가두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시장에서 재료 사는 것부터 명절 음식 시작이다.




종갓집에서 자랐지만 말없이 큰일을 다 해낸 친정어머니 덕분에 입만 호사를 누렸다.

눈으로 보기만 하고 직접 음식 해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결혼해서도 많이 헤맸다.

다행히 막내며느리라 서열상 음식보다 심부름만 했다. 워낙 형님들이 솜씨가 좋았다.





이제 자녀들이 결혼하나씩 옆에  달고 이들을  위해 음식 장만해야 했다.

툭하면 남편에게  부족한 재료 사 오기 양파 껍질 벗기기 등  몇 번이나 도움을 청했다.

아들이 결혼한 첫해 추석에는 행동이 빠른 며느리가 한몫 톡톡히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손녀딸을 우리 품에 안겨준 대신 부엌일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손녀딸 하나로 온 식구가 밥 먹을 때마다 전쟁이다.




그리하여 명절 대안으로 자녀들이 여행을 제안했다.

올 설에는 딸이 오크밸리를 예약했다.

때에 맞게 눈이 많이 와서 발왕산이 온통 하얗게 뒤덮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눈 구경을 실컷 했다.

추석에는 며느리가 가평 북한강 주변에 예쁜 한옥으로 지은 펜션을 예약했다.

명절만 돌아오면 공항과 호텔, 펜션이 미어터진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때마다 저들은 고향도 안 가나? 속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대열에 끼어있었다.

각자 사정으로 명절을 보내는데 그동안 내 사고의 틀에 박혀

나와 같은 명절을 보내지 않은 사람들을 매도했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가평 근처 북한강 강변에 위치한

"미분재" 대문을 밀치자 곡선을 이룬 계단이 아름답다.

거실에는 오후 햇살이 가득 차있다.  

푸른 산을 병풍삼은 북한강이 바로 앞에서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높은 천장에 서까래가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거실 탁자에 놓인 녹차 세트도 앙징맞다.

침구도 희고 눈부시다.

그 위에 놓여있는 잠옷도 실크처럼  부드럽다.

시골 빈집은 문 열고 들어서면 오래된 냄새가 훅 들어왔다.

익숙한 향기 부모님의 체취가 곳곳에 묻어있는 부담 없고 편한 곳이다.

그런데 이곳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향기 나 곳이지만 내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다.

잠시 안락한 소파에 몸을 부리고 우엉차 한잔으로 긴장을 풀었다.

그동안 시골집만 찾다 보니 낯선 곳에서 명절을  보내는 게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촌스럽게~


한복 입은 손녀딸  재롱부리는 모습에 완전  무장해제가 되었다.


남편과 아들은 야외에서 고기를 굽느라

땀을 흘리고 있다.

손녀딸은 엄마. 아빠 다음으로 배운 단어가 우산이다.

우산을 우와라고 부르며 잔디 깔린 마당을 몇 바퀴나 돌고 다닌다.

이글거린 태양은 빛을 잃어가고 고기는 숯불에서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다.

집안 일 하려면 무조건 아이들 등에 업고 다녔던 우리 세대들 이야기는

벌써 "라떼"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때를 기억하며 손녀딸을 보면 무조건 등을 내민다.

그때마다 작은 발로 아장거리며 걸어와서 내 등에 자기 몸을 기댄다.

처음으로 삼대가 모여서 추석 명절을  낯선 곳에서 보내는 밤이다.

그런데 고향집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 손녀딸 # 추석 # 가평 # 미분재 # 북한강

# 시댁 #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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