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도 별로 많지 않은 시절에 하필 '여학생'이 씌인 쪽지를 주었다. 눈을 씻고 찾아도 없어서 슬그머니 뒤로 빠지고 말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 악착같이 찾아야지 왜 뒤로 빠지는지 저런 학생이 있어서 큰일이라고 했다. 속이 상했다. 나라고 달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지금 여학생이 어디 있을까? 다들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있겠지.
훗날 알았다. 여학생은 꼭 중학교 다니는 여학생만 뜻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한 달 동안 준비했던 여학생들의 소고춤과 강강술래로 운동회는 점점 흥이 넘쳤다.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강강술래를 외치며 흥이 난 우리들은 버선짝이 보이도록 발을 굴렸다.
막걸리 몇잔으로 기분 좋은 학부형들은 우리랑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남학생들 기마전은 전투나 다름이 없었다. 서로 상대 적장의 모자를 뺏으려고 함성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상대 적장의 모자를 빼앗아 자기 머리에 쓰고 손을 흔들며 친구들이 팔로 만든 가마를 타고 진영으로 돌아갔던 대장 친구는 누구였을까?
각 마을 학부형들 중에 선수로 뽑힌 마라톤 경기가 운동회 마지막을 장식했다.
교정을 나가 면사무소에서부터 섬진강까지 쭉 뻗은 길에 순경 아저씨들이 오토바이에 태극기를 달고 먼저 출발했다. 그 뒤를 따라 선수로 뽑힌 학부형들이 달렸다. 코스모스가 활짝 핀 길에는 선수들이 지나갈 때마다 응원하듯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올림픽 마라톤을 응원한 것처럼 우리들은 아버지들을 향해 발을 구르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청군이나 백군이 이겨도 놀이가 없던 시절 가을 운동회는 온 마을 축제로 끝이 났다.
함지박을 이고 가는 어머니들 뒤에 막걸리로 흥이 난 아버지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지러진 옷자락 ~~~
운동회를 마치고 난 후 사교 시를 마치고 각 마을로 밴드부들은 공연을 다녔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밴드부가 결성되었는데 쓸만한 악기가 없었다고 한다.
하모니카는 녹이 슬고 피리는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큰 북, 작은 북도 찢어지고 심벌즈도 녹이 슬었다. 그래서 학부형들에게 협조를 구하고, 각 마을에서 보리쌀과 쌀을 걷어 필요한 악기를 샀다고 한다.
운동회를 마치고 가을걷이를 하고 계신 학부모님들에게 답례를 하기 위해 동네마다 인사를 다녔다.
고달리, 백곡리, 학교에서 십리길은 족히 되었다.
다리가 아파서 투덜대기도 했지만 동네 어귀만 들어서면 악대장의 호루라기에 맞추어서 줄을 정비했다.
둥둥 큰북이 힘차게 울리면 모든 악기가 제각기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며 가을 들판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