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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어머니 되고 보니

밴댕이 속 며느리, 마음 넓은 며느리

by 진주

자녀이 모이는 날 토종닭이 대 여섯 마리 초상 치르는 날이다. 이 벗겨진 닭은 나체로 문간방 부엌에서 인삼과 마늘을 뱃속에 빵빵하게 넣은 채 엉겨있었다.

푹 고아진 닭이 구수한 냄새를 온 집안에 풍기자 메리도 잔치가 난 듯 마당을 뛰어다녔다. 우리 친정도 셰퍼드 이름이 메리였는데 시댁도 메리였다.

큰 양픈에 담아서 상위에 올려놓고 시어머니는 며느리들에게 닭다리를 쭉 쭉 찢어 주셨다.

찬밥이 남을 때도 먼저 챙겨서 뜨끈뜨끈한 국물에 말아서 시고 며느리들에게는 갓 지은 밥을 퍼 주었다.

시장 다녀오시는 길에 참외, 수박, 과자,

빵 등 사 오셔서 입덧하는 나에게 몰래 넣어주셨다.

둘째 출산할 때는 십일월인데도 제법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대부분 크고 작은 일을 남편에게 시켰다.

세탁해 놓은 빨래는 남편이 저녁밥 먹은 후에 우리 방로 가져왔다.

큰 빨래가 있으면 남편더러 “힘 어디다 쓸래 겨울잠바는 니가 빨아서 입어라” 하셨다.

어머님이 아들에게 일을 시키자 나도 철없이 심부름을 시켰다. 그러자 "나는 일을 시킬 수 있지만 양조장 일도 바쁜데 너까지 시키면 쓰것나” 하시며 핀잔을 주셨다. 속으로 어머님 아들만 되나 부탁 좀 할 수 있지 하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어느 해 무더운 여름 아시는 분 초상이 났다. 상가 조문 하고 같이 대문을 들어섰다.

우리들을 보자마자 “아까운 내 새끼”! 복 더위에 얼마나 덥냐 하다.

써 큰 방에 베개랑, 고실고실한 삼베 홑이불과 함께 선풍기를 틀어놓았다. 시골집이라 가끔 파리도 날아다니니 미리 모기장도 쳐 놓았다. 같이 다녀온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고 아들만 생각하는 것 같아 내심 서운했다.

낮잠 자는 손주들에게도 항상 가벼운 부채바람을 부쳐주셨다.

아들보다 며느리를 생각해 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아들 먼저 생각하면 당연하게 이해하면 될 텐데 너그럽지 못한 며느리인지라 크고 작은 일에 섭섭했다.

두 분 형님과 시누이까지 세해서 시어머니 흉을 보면 웃으셨다.

동서 흉은 서로 보면 안 돼도 며느리들끼리 시어머니 흉을 봐도 된다 하시고 옆집으로 마실 가셨다. 참 마음도 넓으시고 사고가 트이신 분이셨다.




올해 추석은 어느 때보다 빨리 돌아왔다. 추석 전날 며느리가 일찍 와서 전도 부치고 허드렛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부산 사는 오빠랑 올케 언니가 프랑스 위그노 기념일 참석차 출국했다가 추석 전날 도착했다.

젊은 시절 신세를 많이 졌던 오빠, 올케 언니에게 그동안 제대로 해준 게 없었다.

그런데 음식 장만해 놓는 추석 전 날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묵고 가니 대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들, 며느리는 가까운 자기 집에서 자고 다시 왔다.

어제 음식 장만하느라 힘들었을 건데 아침에 일찍 와서 힘들지? 했더니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오빠는 원래 아침형이 아니라서요

나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들에게 아버지 방에 가서 좀 더 자거라 하며 밀어 넣었다. 그랬더니 아들이 엄마! 괜찮아요 연진이랑 같이 상차림 도울게요 하며 식당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그 아버지 그 아들이었다.




분주하게 식사 끝내고 오빠랑 올케언니는 10시 기차 타기 위해 떠났.

설거지 마치고 가정예배 드리고 난 후 아들 내외는 친정 원주로 떠났다.

집이 조용해지자 그때서야 아침 일이 생각났다. 앗차! 하는 생각에 며느리에게 카톡을 보냈다.

옛날 시어머님께서 아들만 생각한다고 속상했는데 나도 똑같더라 너는 상차림 하는데 아들은 방에 가서 좀 더 자라고 했던 것 생각하니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시에미구나.

요즘 너도 연극 연습하느라 힘들었을 건데 수고 많았다 하고 카톡 보냈다.

그랬더니 며느리에게

" 결혼하고 처음으로 북적북적하고 아가씨와 어머니랑 이야기 나누며 함께 전 부친 것도 좋았습니다. 특히 부산 외삼촌, 외숙모님과 모님 가족들과 함께 모여 윷놀이가 제일 추억에 남을 것 같아요.

더구나 남자,여자 편가르기로 우리 편이 이겨서 좋았습니다. 남자들이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앞으로 시집생활이 달달하겠구나 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라고 답장이 왔다

시골에서 할머님 중심으로 대가족으로 살아왔던 며느리는 어른들과 관계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부모님과 형제, 고모님들이 자주 왕래하며 살았던 며느리는 안 일과 정리정돈도 잘했다.

올해도 며느리 친정에서는 배추 400 포기 정도 심었다고 한다. 직접 뽑아서 다듬고 소금간 하고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김장할 계획이란다. 요즘 세상에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인데 올해 서른여섯 살 된 며느리가 해년마다 했던 일이라고 괜찮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일 잘하는 며느리가 들어와서 나는 복이 터졌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옛날에는 결혼하면 시댁 가풍을 배우기 위해 3년 정도 시집식구들과 같이 지냈다.

우리 부부는 시댁 가풍을 배운다는 것은 허울 좋은 소리였다.

사실 남편이 하는 사업이 망해서 시집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피해의식과 자기 연민으로 시어머님과 형님이 잘해주셔도 밴댕이 속이 되어서 자주 상처받았다. "시어머니가 되고 보니" 나는 시어머니처럼 사랑이 넉넉하지도 않다.

며느리처럼 눈치껏 일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고 눈치 없는 며느리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주시느라 때로는 이 많이 상하셨을 것이다.

'시어머니 되고 보니 ' 어머니의 마음이 이제야 헤아리게 된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모기장 # 형님 #김장#윷놀이#자식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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