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가족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마당에서 세계로

by 진주


나의 유년 시절의 놀이터는 우리 집 마당이었다. 작은 집은 우리 집 들어오는 입구에 있었고

당숙모 집은 부엌문만 열면 우리 집 마당이었다. 눈만 뜨면 우리 집 마당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배가 슬슬 고파 오면 가마솥에 쪄 놓은 고구마를 꺼내서 먹느라 소드 방 뚜껑이 불이 났다.

상 할머니께서는 날마다 마당에서 재나 저지르며 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니그 집은 방이 없냐? 말래가 없냐? 닭 쫓는 간짓대를 흔들어 대시면 나도 사촌 언니들과 함께 대문 밖으로 쫓겨나갔다.




그래도 다시 들어와서 마루턱에 얼굴을 내밀고 누워서 거꾸로 보는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잡으려고 사촌 언니들과 함께 장대를 들고 집을 나섰다. 할머니께서 우리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씨잘 대기 없는 짓 한다며 콩 타작하고 나면 고무신 짝 들고 마당에 널려있는 콩이나 주우라고 하셨다.

우리 신발보다 훨씬 큰 할머니 고무신을 들고 콩을 줍다 말고 냅다 도망쳐서 해가 오지리 산 쪽으로 숨어들자 집으로 들어왔다. 식구가 많아서 어느 상에 앉아서 먹겠거니 하고 낮에 도망갔던 나를 아무도 찾지 않았다.




이렇게 밤낮없이 같이 지내던 희숙이 언니가 국민학교 4학년 2학기 때 읍내로 이사를 갔다. 5학년이 되던 그다음 해 영미 언니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나 혼자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

언니들과 함께 삔 치기 하며 놀았던 곳을 지나치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돌았다.

읍내로 이사 간 희숙이 언니는 제사 때에 당숙모랑 같이 왔는데 훌쩍 키가 커서 왔다. 큰 키에 운동화를 신고 가슴에는 노란색 해바라기 "수"가 놓인 빨간색 주름 원피스를 입고 제법 도시 냄새를 풍기며 낯선 모습으로 왔다. 부산으로 이사 간 언니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주 오지 못했다.




요즘 카톡으로 서로 안부 묻는다.

그때는 예쁜 편지지를 문방구에서 샀다.

밤새워 "그리운 언니에게"

너무 보고 싶어 언니! 언니도 나 보고 싶지? 주저리주저리 편지를 서 우체통에 넣고

언제쯤 답장이 올까?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되어 부산을 가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부산 해운대를 보려고 희숙이 언니랑 함께 정호를 데리고 갔다. 역사적인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여덟 명의 아이들이 작은어머니 뒤를 따랐다. 나는 차만 타면 특유한 냄새 때문에 차멀미를 심하게 했다. 깻잎을 손수건에 싸서 코를 막고 버스를 타고 다녔다. 차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깻잎도 제기능을 못하고 심한 멀미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해운대 모래사장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처음 맛본 바닷물은 비릿함과 소금기로 짭짤했다.

또랑에서 배운 개헤엄을 치다 바닷물에 떠다니는 수박껍데기를 나도 모르게 깨물고 말았다. 밀가루 반죽으로 튀김옷 입히고 빵가루 묻혀 식용유에 튀긴 핫도그를 해운대 백사장에서 음으로 맛보았다. 겉은 설탕이 군데군데 뿌려져서 달짝지근했다.

속은 소시지의 짭짤한 맛과 고소함이 어우러져 맛있었다.




부산은 겨울에도 날씨가 따뜻해서 눈이 내려도 금방 녹아서 쌓인 눈을 볼 수 없었다.

흰 눈으로 뒤덮인 앞산을 보고 싶어 겨울방학 때는 부산언니가 고향을 찾아왔다.

새 또랑 밭에서 자란 고구마가 달고 물이 많았다. 뜨끈뜨끈한 고구마를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껍질 벗기고 동치미랑 같이 먹었다. 흰 눈으로 뒤덮인 앞산에서는 바람이 불자 또다시 눈이 사방으로 날렸다.




우리가 자라가 매 놀이터가 바뀌어져 갔다. 결혼 후에는 읍내 언니는 솜씨가 좋아서 옷을 만드는 쟁이가 되었다. 지금까지 뜨개질로 원피스, 스웨터, 조끼, 모자, 장갑 등 대꼬 쟁이로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디자인으로 예술을 담아내고 있다. 부산 살았던 언니는 캐나다로 간지 어연 20년이 훌쩍 넘어섰다.

그곳에서 제법 규모를 갖춘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생활이 안정이 되었다.

사촌 동생은 미국으로 가서 터를 잡고 자녀들을 믿음으로 훌륭하게 잘 키웠다

우리 집 마당에서 놀던 사촌, 육촌 형제들의 놀이터가 이제 세계로 흩어져서 간간이 소식만 전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편찮으셨던 당숙모님께서 하늘나라 가셨다는 소식을 오빠가 전해줘서 알게 되었다.

때마침 한국을 찾아온 사촌 동생과 함께 몇 년 만에 기차를 타기 위해 영등포 역에서 만났다.

11월 초 내려 갈수록 차창 밖 늦 가을 시골 풍경은 논마다 휑하니 텅 비었다. 멀리서 보이는 산등성이 마다 단풍이 불타고 있다. 젊은 시절 당숙모는 가을만 되면 인근 유원지로 봉사활동도 자주 나가셨다.

섬진강 나룻배 타고 학교 다니던 중, 고등학교 시절 날씨가 궂을 때는 의례히 당숙모 집 신세를 졌다.

그때마다 당숙모님은 따뜻한 저녁밥 차려주시며 빈 도시락 꺼내 놓으라고 하셨다. 이튿날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검은 콩자반과 볶은 멸치 반찬과 하얀 쌀밥으로 도시락까지 싸주셨다.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다. 고향에 내려가면 꼭 찾아뵈야지 했는데 소천했다는 소식에 언니랑 통화하며 울고 말았다. 무엇이든 생각날 때 즉시 행동에 옮겨야 하는데 직장 다닌답시고 계획만 세웠다.

우리 집 가족사진은 또 한 분이 추억을 남기고 무르익어 가는 가을에 먼 길을 떠나셨다.

영정 사진 속 우리 당숙모님은 가장 아름다운 때에 모습으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떠나보내는 자리에는 또 서로 바빠서 안부만 묻고 살던 형제, 친척, 친구들 만나는 자리가 되었다.

각자 삶의 놀이터에서 열심히 살아내느라 얼굴에는 삶의 훈장들로 주름져 있었다.

앞으로 우리들이 마주하게 될 미래의 놀이터는 어디일까? 이 세상 소풍 끝마치는 날 다들 천국에서 만나길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당숙모님!

그동안 살아내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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