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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27일

흑백 사진 이야기

by 진주

1969년 10월 27일 수학여행 단체사진



촌년이 처음으로 기차 타고 수학여행을 갔다.

인천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둘째 날이던가?

맥아더 장군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탔다. 차멀미에 얼굴이 샛노래졌다.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속은 울렁거리고 비실거렸.

찬바람만 쏘이면 속을 달래줄 것 같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내 사정은 봐주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어느덧 비릿한 바다내음이 풍기더니 갯벌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유공원 도착다.

스마트하고 맵씨 나는 군복에 각 잡힌 모자를 쓴 맥아더 장군이 살아서 내려올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쌍안경을 들고 서있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바다를 향해 좌우 살펴본 후 작전 개시를 할 것 같았다.

자유 공원을 구경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그리고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나누어 주었다.

우리 집 젖염소에서 난 우유와 다른 맛이었다. 빵 맛도 하얀 크림이 들어서 비위가 상했다.

밀가루에 막걸리 넣고 부풀려서 만든 술빵만 먹고살았던 때다.

가방에 넣으려다 실수로 갯벌에 빵을 빠트리고 말았다.

그때 당시 우리 고장 국회의원이셨던

정 래혁 씨의 특별선물이었다.

그런데 빵 맛도 보지 못한 채 갯벌에 밥이 되어버렸다.

차만 타면 멀미를 했다. 차창 밖 구경도 하지 못한 채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거리다

담임 선생님께 걱정만 끼쳐드렸다.




서울 어디쯤인지 기억할 수 없지만 높은 빌딩이 올라가고 있었다.

지금은 철거가 되었지만 그때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청계천에 세워졌던 "삼일빌딩"이었다.

여관에 들어서자 처음으로 본 텔레비전에서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남자분이 나왔던 장면을 보았다.

신기해서 한참 서서 몰래 훔쳐보다 선생님 호루라기 소리에 숙소로 달려갔다.

텔레비전이 보급된 후에 알게 되었다. 금은 고인이 되신 코미디언 '구봉서' 씨였다.

저녁밥 먹은 후 각자 배치된 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여학생, 남학생이 모인 자리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난이 시작이 되었다. 합판으로 엉성하게 칸만 분리가 된 방이었다. 벽이라고 세운 칸막이가 떨어져서 손이 들락날락거렸다.

서로 여자 방, 남자방으로 쓰레기를 밀어 넣다. 욕하는 남학생들도 있었다.

우리도 질세라 같이 욕을 해댔다.

결국 선생님께 꾸중 듣고서야 각자 쓰레기를 치웠다.




창경원 (창경궁)을 관람하던 날!

전국 각지에서 수학여행을 왔다.

창경원 앞에서 줄 서서 입장을 기다렸다.

가만히 얌전하게 줄만 서있는 우리들이 아니었다. 각 학교 선생님들은 호루라기와 회초리로 모든 학생들을 통제했다.

햇볕이 너무나 좋은 가을 날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모자도 없이 햇볕아래 그대로 서있는 시간은 지루하기만 했다.

화장실 가고 싶어도 참았다.

이 많은 대열에서 한 발자국만 빠져나가도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이제야 고백이지만 그 자리에서 그대로 윗옷을 끌어내려 엉덩이를 감추고 오줌을 쌌다.

장난꾸러기 남학생들은 서로 발차기로 싸웠다. 선생님들의 호루라기 소리와 회초리 소리도 요란했다.

우리나라 위엄을 높여 주던 궁궐이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 동물원으로 격하시켰다.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어버린 창경원이었다. 역사의식이 없었던 때라 호랑이, 코끼리, 사자, 예쁜 공작새, 곰, 등 책에서 보았던 동물들을 실제로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때 궁궐 안에서 찍은 단체 사진 한 장이 달랑 남아서 추억을 소환하고 있다

어느 궁궐 앞에서 찍었을까? 기억이 없다.




국민학교 졸업한 후 30여 년 만에 동창회 모임을 가졌다. 6학년 3반 담임선생님이셨던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흑석동에서 살고 계셨는데 벌써 20여 년이 흘러갔다. 자그마한 키에 열정이 많으셨고 한 사람이라도 졸업장을 주기 위해 애를 쓰셨던 분이셨다.

우리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방학만 되면 읍내로 아기 돌봐주러 간 친구들이 많았다. 개학이 되었지만 학교에 돌아오지 않자 가정방문을 하셨다. 부모님 설득시켜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분이셨다.

검은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어머니 날" 꽹과리를 치며 흥을 돋아 주셨던 선생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되어서

옛 궁궐의 위엄을 높이고 있다.

해년마다 궁 가까이에 있는 병원에 검진차 가는 길에 둘러보는 조선의 왕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선이 망하자 일본으로 끌려갔던

비운의 왕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우리나라를 짓밟고 유린했던 일본 황실 가문의 딸 이방자 여사와 결혼했다.

해방이 되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왕이다.

평민으로 한국에 돌아온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이 돌아가신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정신 질환에 시달리던 시누이 덕혜옹주를 돌보며 창덕궁 내, 낙선재에서 께 지냈다.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하며, 사회 복지사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역할을 감당하셨다.

낙선재 앞에 고목들이 모진 풍파 속에 견디어온 우리 역사를 지켜보며 우뚝 서 있다.

우리 인생도 한때 왕자, 공주였을지라도 무수리도 될 수 있다. 왕궁만 다녀오면 겸손해진다.

11월이 되면 또다시 찾게 될 왕궁은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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