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 할머니 집 골목으로 들어가면 한철이 집 앞에 세 번째 공동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법 깊었는지 두레박을 툭 떨어트리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에서 첨벙 하는 소리가 멀리 들린 것 같았다.
높은 까끄막에서 사는 이웃들이 눈이 내리거나 비가 올 때는 길이 미끄러워 물을 깄지 못할 때도 있지만 비축해 둔 물로 눈길이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우리 동네 사거리로 넓은 공터에 겨울에도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었다. 다리를 건너가면 섬진강으로 나가는 길이었고 일자로 뻗은 길은 동네 위아래 오고 가는 길이었다. 다리 맞은편 작은 점방을 끼고돌아 지금은 진택이 오빠가 살고 있는 골목길을 걸어 들어가면 큰 우물이 재관이 집 대문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사거리는 제법 넓어서 동네에서 콩쿠르대회가 열리면 이곳에서 무대를 만들어 놓고 노래자랑을 하기도 했다. 설이 돌아오면 튀밥 튀는 아저씨도 꼭 이곳에 자리 잡고 하얀 뭉게구름 같은 짐을 내뿜으며 뻥!
하고 울리는 소리가 산골마을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던 곳이다.
( 마을 어귀 샛돔에 서있는 정자나무)
우리 동네 자랑거리는 동네 어귀 샛돔에 서 있는 큰 정자나무였다. 바로 그 옆에 다섯 번째 공동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항상 새 돔 할머니 댁에 가려면 그 우물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그 샘은 자주 건수가 들고 물이 말라 그 기능을 상실한 탓에 메이고 말았다.
시냇물이 마을 한가운데 흐르고 있어서 동네가 양달과 응달로 나뉘었다.
양달과 응달을 오고 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었고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동네 사람들이 동원이 되어서 흙다리를 만들었다. 소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서 흙과 짚을 넣고 비벼서 만든 흙다리는 동네 중앙에 놓여있었다. 겨울철에는 비가 오지 않아 견뎌냈지만 장마철이 되면 많은 비가 쏟아져 순식간에 떠내려가고 형체조차 사라지고 없어졌다.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던 시냇가가 갑자기 거센 물결로 나무뿌리가 뽑힌 채 떠내려가는 공포스러운 곳이 되기도 했다. 며칠 지나면 어느새 사납던 거 센 물결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떠내려 왔던 돌멩이를 간지럽히며 흘러가고 있었다. 흙다리가 떠내려 간 곳에 다시 징검다리를 놓았다. 겨울철이 되면 내년 장마철에 떠내려 갈지라도 동네 분들은 꿋꿋하게 또 흙다리를 세웠다.
응달 쪽에 살고 있는 친구네 집 앞에는 바로 앞산이었다. 산 밑에 공동우물이 자리 잡고 있어서 소나무 잎, 송홧가루나 꽃잎도 자주 떨어져 있었다. 가을에는 단풍에 물이 든 것처럼 샘물도 울긋불긋 보였다. 그래도 그 물이 달고 맛있었다. 그 친구 집에서 놀다가 마당에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부지런히 골목길을 뛰어서 내려왔지만, 우리 집 마당에는 아직도 해가 저만치 떠있었다.
우리 동네는 이렇게 여섯 개 우물을 중심으로 동네가 형성이 되었다.
(조 굴 탱이 )
산이 병풍처럼 둘러 쌓인 우리 동네는 한가운데 흐르는 시냇물이 조 굴 탱이를 지나서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네 앞에 흐르는 시냇가에는 해 질 녘이 되면 크고 작은 돌에 까맣게 대사리가 붙어서 몸통을 내놓고 숨을 쉬고 있었다. 손이 가면 껍질 속으로 몸통을 숨긴 대사리를 잠깐 잡아도 고무신으로 하나 가득 찼다.
물을 채운 양푼에 대사리를 담가 놓으면 다음날 아침 된장 풀어서 끓여놓은 된장국은 특유의 텁텁함은 사라지고 시원하고 맛있었다. 학교를 다녀온 후에는 바늘로 대사리를 까서 먹었다.
대사리로 우려낸 육수에 툼벙 툼벙 뜯어서 수제비를 끓여내면 그 맛도 일품이어서 우리 곡성 대표음식이 되기도 했었다. 간에 좋다고 해서 지금도 여전히 인기가 좋지만 옛날처럼 대사리가 흔하지 않다.
고란에서 황석 굴로 올라가는 골짝에는 새우와 찡 게미가 살고 있었다. 찡 게미는 앞발이 찌개처럼 커서 물리면 아프기도 했다.
새우와 찡 게미를 잡아서 햇볕에 바싹 달구어진 바위에 올려놓았다가 빨갛게 익은 것을 간식으로 먹다가 간디스토마가 걸려서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다.
산속에 쌓여 있는 동네였지만 입구만 들어서면 엄마 품속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곳이었다. 가운데 골목에 사는 옥숙이 언니 집은 산 중간쯤 올라간 기분이었다. 언니 집에서 우리 집을 바라보면 한참 낮은 곳에 있었다. 섬진강에는 우리 동네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무로 만든 배 한 척이 놓여있었다.
시야가 확 트인 옥숙이 언니 집 마당에서는 누가 오고 가는지 다 볼 수 있었다.
아침 10시, 오후 3시 하루 두 번씩 여수에서 올라오는 풍년호가 우리 마을 새참을 가져다주는 시계 역할을 했다. 기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은 동생들을 업고 논, 밭으로 엄마 찾아 젖을 맥이고 왔다.
가을이 되면 은섭 오빠는 섬진강에서 민물 게를 잘 잡았다.
약간 색깔이 노르스름한 민물게는 하얀 찌개 발에 검고 보송보송한 부드러운 털이 감싸고 있었다.
민물게로 게장을 담가서 겨울 내내 밑반찬으로 가끔 손님이 오시거나 반찬이 어중간할 때 게 밥이 거의 다 될 무렵에 게를 얹어서 같이 쪘다. 게장은 숟가락에 조금 찍어서 김에 싸서 먹어도 맛있고, 노랗게 알이 백인 게딱지에 밥 한술 넣어서 비벼 먹는 맛은 바다 게장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우리 마을이 가장 왕성할 때 120여 가구 정도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줄어든 가구 수가 살고 있지만 한집에 거의 한두 분씩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총인원이 40여 명이 채 안된다고 한다. 흙다리는 매년 떠내려가고 없지만 이제는 튼튼한 다리가 두 개나 응달, 양달을 오고 갈 수 있도록 세워져 있다.
(흙다리 대신 튼튼하게 세워진 다리)
동네 어귀에 서있는 정자나무는 보름이 되면 그네를 매달아서 하늘 높이 창공을 가르며 멀리서 오고 있는 봄을 미리서 맞이했다.
동네 어르신들의 쉼터였고 마음껏 우리들에게 그늘 막을 내어주던 우리 동네 상징이었던 정자나무!
이제는 그곳에 전각이 세워져 있고 여름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겨울에는 난방도 들어오게 되어 있단다.
옛날에는 남자들의 성역이었고 어린아이들만 그늘막에서 땅 따기 먹기하고 놀았다.
논, 밭에서 일하고 들어오는 길에 꼭 정자나무 그늘을 지나쳐야 했다. 그러나 여자들은 감히 그곳을 지나오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고 한다.
이제는 정자나무 쉼터를 여자들이 차지했다. 세월이 변한 만큼 여자들의 목소리가 커진 것도 시골이라고 다를 수가 없다. 공동우물, 정자 또랑, 골안, 각시 방죽, 조 글 탱이, 섬진강 나룻배 등 사라져 간 풍경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앞산, 뒷산은 그대로 우리 동네 역사를 바라보며 우직하게 서있다.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우리 마을 고달리는 지금도 추억 창고에 저장되어 엔터 키만 누르면 사계절이 한편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카톡방이 옛날 사랑방을 대신하고 있다.
팔십 대부터 삼십 대까지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삼촌, 고모, 언니, 오빠, 동생들이 오늘도 서로 안부 묻느라 카톡 사랑방에서는 카톡! 카톡! 울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