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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 우물로 이루어진 고달리 마을(1)

고달리 이야기

by 진주


우리 동네는 골안이라는 골짜기에서 내려오면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길 양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고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시냇물이 되어 산허리를 돌아올 때는 돌담을 헤치느라 흰 물보라가 넘쳐나기도 했다. 소나무 가지 사이를 부지런히 들락거리며 따뜻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이면 진달래가 피었다. 그 사이사이에 길게 뻗은 하얀 싸리 꽃이 분홍색 진달래 속에서 더 하얗게 빛났다. 하얀 솜털 속에 감추어진 진자줏빛 할미꽃도 활짝 피어있지만 고개 숙이고 있는 자태가 슬픔이 더해지는 것은 전래동화에 내려온 이야기 때문이리라.

마을이 시작되는 어귀에는 큰 물레방아가 작은 유리구슬을 모아두었다가 힘차게 굴리듯 아래로 떨어지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로 옆에 우리 동네 하나밖에 없는 방앗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름에는 보리, 밀방아를 찧었고 가을에는 집집마다 거두워 드린 나락으로 쌀 방아를 찧었다. 해가 오지리 쪽으로 넘어갈 때쯤

집집마다 굴뚝에서 하얗게 피어 올린 연기가 초가지붕을 타고 올라갔다.



첫 번째 공동우물은 방앗간에서 길하나 사이에 있었다. 6,25 동란 때도 다른 샘은 물이 다 말랐어도 이 샘만큼은 철 철 물이 흘러넘쳤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가장 좋은 샘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방아 찧던 날 방앗간 오는 길에 공동우물에서 엎드려서 물 마시던 생각이 난다. 항상 물이 넘쳐서 샘 위로 치솟고 있었다.


정자 또랑에 다다르면 제법 큰 바위가 산 밑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큰 소나무가 바위에 그늘을 내려주어 우리는 그곳에서 옷을 벗어 놓고 목욕을 했다. 큰 바위가 있는지라 그 주변은 제법 허리만큼 물이 차 있어서 국민학교 때까지는 그곳 정자 또랑에서 개헤엄 치고 놀았다. 골 안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가 또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에는 각시 방죽도 있어서 물이 차고 시원했다. 울퉁불퉁한 큰 바위 위에 올라가면 맨 꼭대기에는 두세 사람이 설 수 있는 편편한 곳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다이빙을 배웠던 곳이기도 했다. 정자 또랑에서 놀다가 좀 더 크면 이곳으로 가서 여름 내내 개헤엄을 치고 놀다가 나중에는 섬진강변으로 갔다.



정자 또랑에서 내려오면 마을회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담당했던 곳이다.

결혼식이나 초상이 나면 공동으로 사용했던 그릇, 결혼할 때 사용했던 병풍, 활 옷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동네일을 보시던 아저씨가 위아래로 징을 치며 동네 사람들에게 결혼식이나 장례를 알렸다. 대소사가 있으면 동네 분들이 함께 일을 도와주었다. 단단하게 여문 박을 타서 햇빛에 잘 말려서 마른 곡식 담은 용도나 물 퍼 담은 바가지로 쓰였다. 누룽지가 누렀을 때는 물 한 바지기 붓어서 불을 땐 다음 끓어오르면 바가지 속에 주걱을 넣고 한 방향으로 돌리면 부드러운 눌은밥 숭늉이 되었다. 눌은밥 숭늉을 퍼놓고 다시 물을 붓고 숭늉 물을 만들어서 바가지로 푸면 손잡이가 없어도 뜨겁지도 않고 따뜻해서 좋았다.

오랫동안 사용한 바가지는 끝이 닳아서 날렵하기도 했다. 깨진 박은 실로 꿰매서 허드레 용기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웃집 잔치에는 햇 바가지에 밀가루나 쌀을 담아서 오시거나 집에서 낳은 달걀을 집으로 엮어서 꾸러미로 가지고 온 이웃들도 있었다. 서로 품앗이로 콩나물을 길러오는 분, 초상이 날 때는 밤에 야식으로 동지죽을 끓여 오시는 분들도 계셨다.



마을 회관에서 조금 내려와서 골목길로 접어들면 거기에 또 두 번째 공동우물이 있었다. 공동우물과 연결해서 우리 집도 담벼락 사이를 파서 우물을 같이 사용했다. 나중에는 공동 우물물이 부족해서 부엌 앞에다 따로 샘을 파기도 했다. 이른 새벽이나 저녁밥 지을 때가 되면 항상 담 너머 우물가에는 아줌마들 소리로 가득했다. 푸성귀를 씻은 후 서로 나누어 주던 이웃들의 정이 오고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 집은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마루 끝에 누워서 건너편 앞산의 사계절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산봉우리에 맞닿은 파란 하늘에 때로는 구름은 물감도 붓도 없이 토끼, 우리나라 지도 등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놓고 사라지곤 했다. 여름에는 짙은 녹색으로 우거진 나무들이 햇볕에 꼼짝 못 하고 늘어져 있었다. 가을에는 군데군데 서서 나부끼는 갈대가 각가지 나무를 간지럽힐 때쯤 이면 단풍이 물들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하얀 눈이 또 다른 세상으로 그림을 그려놓았다. 나무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망울망울 쌓여있는 나뭇가지에 꿩들이 가끔 지나가다 가지를 치면 다시 눈발이 후드득 후드둑 사방으로 흩어졌다.


눈이 그치고 나면 친구들과 동네 앞산 꼭대기까지 올라가 높이 세운 동상이 되어서 마을을 내려 다 보았다. 우리 집 마당은 손바닥만 했고 골목길은 긴 대나무 간짓대를 눕혀 놓은 것처럼 좁아 보였다.


계속 이어집니다


#공동우물 # 시냇물 # 물레방아# 바가지

# 숭늉#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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