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작은아버지

작은 엄마 아버지 회혼례

by 진주

작은 아버지만 생각하면 월남전이 생각난다. 5060 세대들이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는 월요일만 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아침 조회를 했다.

교장선생님의 기억나지 않은 긴 훈화를

듣는 둥 마는 둥 장난치다 걸려서 선생님께 꾸중 들었던 기억이 난다.

조회를 마치자마자 전교생들이 발맞추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오 학년 일반" 부르자 힘 있게 두 팔 흔들며 운동장 한 바퀴 돌아 각 교실로 들어갔다.

그때 부르던 노래가 " 맹호부대 용사들아"!이다.

"자유통일 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드래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월남전으로 파병된 우리 오빠. 삼촌, 조카들을 격려하기 위해 부르던 노래였다.

친구들과 어울러서 놀 때도 그 시절에는

유행가처럼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작은 아버지께서도 그때 월남전에 참가하셨다. 숙제로 월남전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가 있었다.

그때마다 작은 아버지께 '지긋지긋한 공산당을 물리치고 조국으로 돌아오세요' 하고 보내드렸다.

그때마다 하노이나 밀림 배경이

담긴 엽서로 답장이 왔다.




우리 아버지, 작은 아버지, 당숙, 모두 귄 위주의 적인 모습이 많았다.

그래서 가깝고도 먼 당신! 두렵기만 한 분들이다. 길거리에서 만나도 뭐가 그리 바쁘신지 인사드려도 받지 않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막내 작은 아버지 우리랑 같은 눈높이에서 잘 놀아주셨다.

해군복과 베레모를 쓰고 동네 어귀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면 숨이 턱 막히게 달려갔다.

양쪽 팔에 사촌언니와 함께 대롱대롱 매달려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장난 끼가 많았던 작은 아버지는 동네 처녀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군대 가기 전 볶은 콩과 볶지 않은 콩을

섞어 동네 처녀들이 모여서 삼 삼고 있는 동네 회관을 찾았다.

고소한 콩을 한 바가지 방가운데 내어놓차

서로 앞다투어 한주먹 씩 쥐어 먹었다

고소함과 비린맛이 섞어서 다들 입맛을 버렸다.

그 이듬해 콩 심으려고 보니 콩씨를 두었던 독이 텅 비었다. 그 소리 듣고 우리들은 손뼉 치며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마도로스로 많은 나라를 두루 다니셨다.

어느 항구에 내려서 “돌아와요 부산항”을 악보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셨다.

나중에는 곱사춤도 추셨다는 이야기는 자주 들어도 재미있었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로 금 교회 안에서 아코디언 연주를 자주 셔서 팔십 대 교회 오빠로 통한다.

그런데 월남전에 다녀오신 분들은 고엽제의 후유증이 있다. 젊은이들의 피 뿌림으로 고속도로가 나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이 되었다.

그러나 건강문제로 대가를 치르고 계시는 세대들이다.

그분들의 땀과 피로 우리나라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분들을 뵐 때마다 늘 고개가 숙여진다.


1970년대 육촌 언니랑 함께 부산을 찾았다. 공중전화 너머로


"새로 이사한 집이 새빨간 넝쿨장미가 엄청 스리 이쁘게 피어있응깨네 그 집만 찾아오면 된다 았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알아보았다.

촌년들이 야끼만두와 탕수육을 맛보자 신세계를 만난 듯 먹어치웠다.

오일장에 돼지갈비뼈 사다 김치. 콩나물 넣어 탕이나 찌개로 끓여서 먹던 때다.

어쩌다가 국그릇에 돼지고기 살 점이 들어있으면 엄청 운수 좋은 날이다.

그런데 돼지고기를 튀긴 것도 모자라 달달한 소스까지 덮어서 큰 접시에 내놓다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달달한 소스가 듬뿍 담겨 바삭하면서도 쫀득하게 씹히는 맛이 혀끝을 매혹시켰다. 항상 우리 형제들이 찾아가면 넉넉한 용돈과 풍성한 먹거리로 호강을 시켜주셨다.

그런데 작은 아버님 어머님께서 벌써 "회혼례"라니 믿기지 않는다.




우리 작은 아버지 어머니!

늘 천국 소망하며 구팔팔 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참고 : 삼 삼고 - 삼베 짜기 전 실을 이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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