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밥을 아시나요

시원했던 단밥이 목에 걸려 컥컥 거리네

by 진주


일을 마치고 언니 집에 들렀더니 2리터 생수병에 식혜을 열댓 병 담아 놓았다.

무슨 식혜을 이렇게 많이 했어 어깨 아프다고 끙끙 앓으면서 했더니, 설이 곧 돌아오잖아

미리미리 해둬야지 ,

언니는 항상 때가 되면 미리 준비해둔 탓에 설이 돌아와도 허둥대지 않고 일가친척들을

맞이한다. 나도 덕분에 몇 병 가져올 수 있었다.

식혜는 천연소화제로 잔칫날에 빠지지 않는 우리 옛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음료이다.

요즘은 전기 보온밥솥에 단 밥을 만들어 먹지만 옛날에는 고두밥 짓고 뜨거운 물과 함께 보리로 발아시킨 엿질금을 삼베 주머니에 넣고 중간정도 되는 독에 함께 넣어서 안방 아래 몫에 모셔두었다.

시간과 온도가 맞아야 밥알도 잘 퍼지고 달보드레한 단 밥이 완성되기 때문에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솜이불로 뒤집어 씌워놓았다.


다른 음식을 준비하기 이전에 단 밥은 아침 일찍 서둘러서 독 안에 안쳐 놓고 각가지 음식을 만드느라 하루 종일 아궁이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10시간 정도 지난 후에 꺼내보면 단내가 훅 올라오고 밥알도 다 퍼져서 둥둥 떠 있었다. 잘 퍼진 식혜을 다시 솥단지 붓고 불을 때서 끓인 다음 설탕도 적당히 넣어서 단맛이 나도록 했다. 펄펄 끓은 단 밥을 한 대접씩 퍼 다가 식구들대로 맛을 보았다. 뜨거울 때나 차가울 때나 마셔도 각각 다른 시원함이 있었다. 우리들은 이 식혜를 단 밥이라고 불렀다.

요즘은 커피, 녹차, 등 여러 가지 차로 마실 것이 넘쳐나지만 옛날에는 제사, 집안 행사, 명절이 돌아오면 식혜나 수정과를 만들어서 다과상에 함께 내놓았다. 음료로도 마실 수 있지만 우리나라 전통과자를 만들 때도 꼭 필요한 감료였다. 식혜을 삼베 자루에 넣어 큰 함박에 걸그랭이를 걸쳐놓고 감료를 짜낸 다음 쇠솥에 넣고 장작불로 고아서 조청을 만들었다. 감료가 다 빠진 밥을 삼베 자루에서 꺼내 조청 고운 솥에 뒤적거려놓으면 달보드레하니 먹을만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가을에 쳐 놓은 솔갱이를 나무청에 쌓아놓으면 갈색빛으로 잘 말라 있었다.

잘 마른 솔갱이를 아궁이에 쳐 넣으면 타닥타닥 타는 소리에 행복했고 무쇠 솥에서 설설 끓고 있는 달달한 향기로 집안 구석구석이 따뜻했고 풍요로웠다.

집집마다 설빔으로 참깨, 들깨, 검은콩, 땅콩등은 볶아놓고 강냉이, 보리쌀, 쌀, 서숙 등 푸짐하게 뻥튀기를 한 다음 고아 놓은 조청으로 강정 만들기 바빴다. 진한 커피색으로 고아놓은 조청은 인절미에 찍어서 먹고 또 엿을 만들기도 했다.

요즘 시장 갈 때마다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은 뻥튀기로 만든 강정집 앞이다.

쌀, 보리쌀, 옥수수, 콩 등 종류대로 쌓아놓고 강정도 즉석에서 만들고 계신다.

몇 가지만 사도 부피도 풍성하니 마음도 풍성해진다.


올해는 그동안 다리가 불편했던 언니가 무릎 수술 해서 병원에 입원 중이다.

어머니 기일, 설도 다가오는데 우리 형제들은 한쪽 날개 잃은 꼴이 되었다.

언니 덕분에 김장김치, 동지죽, 식혜, 인절미, 찰밥 등등 절기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는 시늉만 하고 입은 호사를 누렸다. 이제는 그 호사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동안 언니가 했던 일을 해볼까 했지만 엄두도 나지 않는다.

동짓날에도 팥만 삶아서 시장 떡집에서 만들어놓은 새알시미 사다가 넣고 겨우 끓여서 먹었다.

몇십 병씩 식혜를 만들어서 설날이 되면 푸짐하게 퍼주던 그 일을 올해만이라도 내가 대신해 볼까?

머리로는 할 것 같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병원에 입원 중인 언니에게 어제는 서로 시간이 어긋나서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통화가 되었다.

수술을 마친 몇 칠 동안 아마 진통제를 맞아서 좀 견딜만했는지 씩씩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수록 병원생활이 길어지니 답답하고 수술한 다리도 운동할 때마다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언니를 생각하니 마음 아프다.

그동안 절기 때마다 시집, 친정 식구들 챙기느라 쉼이 없던 언니에게 이렇게라도 좀 쉬었다 가라고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나 보다.


그동안 목구멍에 시원하게 넘어갔던 단 밥이 갑자기 목에 걸린 듯 컥컥거린다.


# 단밥# 강정 # 솔갱이 # 아궁이 # 설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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