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리의 봄

by 진주

하얀 눈 이불 삼아 겨울잠 자던 보리도 기지개 킨다. 때마침 불어온 봄바람에 몸을 흔든다.

보리보다 푸르고 싱싱한 독새풀 호미로 긁어고 흙을 털어 고랑에 붓 하느라 손놀림이 바쁘다.

점심때가 되면 독새풀 소쿠리에 가득 담아 머리에 이고 봄 향기 함께 마당에 풀어놓았다.



바빠지기 전 산으로 나무 갔던 윤 씨 아저씨도 진달래 꽃 한 아름 꺾어서 나무 짐에 빈 도시락과 함께 매달 대문을 들어섰 다.

추운 겨울 소나무, 참나무와 벗하며 지다.

풀어진 햇살에 몽 그리다 활짝 핀 진달래 꽃 빈병에 꽃아 두었다. 들판의 봄, 산속의 봄까지 집안에 맞아 드렸다.

작년에 강남 갔던 제비도 다시 돌아와 처마 밑에 집을 짓기 시작했.

오빠는 그 밑에 널빤지를 깔아주었다. 봄볕이 마루 끝에 머무르고, 뜰방에 누워서 잠을 자던 메리에게 제비똥이 떨어졌다. 부스스 일어나 짖어대기 시작했다.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섬진강 너머 철길에서 올라오는 기차를 보며 미지의 세계로 꽃잎과 함께 날아갔다.

미나리도 성큼 자라났다. 이때쯤이면 시골에서는 화전놀이가 시작되었다.

알맞게 자라난 미나리와 오징어도 넉넉하게 삶아서 고춧가루로 빨갛게 색깔 입혔다.

고추장에 막걸리로 만든 식초 한 설탕도 넣어서 조물 조물 무면 새콤 달콤한 맛이 미나리향과 함께 입안 가득 퍼졌다.

쑥도 뜯어서 절편도 하고 밑반찬 몇 가지 곁들이니 풍성한 먹거리가 되었다.


모처럼 엄마들은 장롱 속에 넣어둔 고운 한복 꺼내 입었다. 짙은 녹색으로 자라난 보리밭 사이를 지나 섬진강 변 포플러 밭에 자리 잡았다. 뚱땅 뚱땅 장구소리가 동네까지 들렸다. 곡조가 맞지 않아도 신명 나게 어깨춤이 절로 올랐다. 장구재비 앞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 치마폭 펄럭이며

추었다.

이 설음 저 설음 뒤엉킨 한을 노랫가락으로

풀어내셨다. 섬진강 저 편 오지리 소나무 밭에서도 장구소리가 아슴푸레하게 들려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까지 장구소리와 엄마들 노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이날만큼은 며느리, 아내, 흐트러진 모습에도 '예펜네들이' 혀를 끌끌 차기도 했지만 너그럽게 봐주셨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보리 베던 윤 씨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불렀다.

보리밭에 수북이 쌓여있는 꿩알을 치마에 싸 주었다. 그날 저녁 푸짐한 찜으로 목구멍으로 밥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밀이 누렇게 익었다.

주인 몰래 한 주먹 끊어냈다.

손으로 비비고 불고 털어서 한 움큼 입에 넣었다. 질겅질겅 씹으면 딱딱한 껍질이 벗겨졌다. 냇가에 앉아서 입안 가득한 밀껍질 씻어내면 매끈한 껌이 되었다.




봄이 되면 푸릇푸릇 자라던 미나리꽝, 보리밭, 밀밭도 사라졌만 번듯한 양옥집은 골목마다 지어졌다.

그러나 자식들이 떠난 집에는 노부부. 혼자 사는 이웃들만 큰 집을 지키고 있다.

여전히 남녘에서는 먼저 봄소식을 알려온다. 구례 산수유 시작으로 광양 매화마을의 매화, 벚꽃 터널을 이루는 섬진강변의 소식이 차례로 올라온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여전히 자리 지킨 나무들은 숲을 이루고 계절 따라 옷을 바꾼다.

지금쯤 산에는 진달래, 뒷산 성환이네 복숭아 밭에는 복사꽃 망울이 맺혀있겠지.


해년마다 새로운 봄은 찾아온다.

그러나

내 마음속 봄은 언제나 파란 보리밭, 앞산에 핀 진달래, 싸리 꽃, 연한 찔구리,

아지랑이, 독새풀 향기. 마당에 날아다니는 제비 보며 짖어대는 우리 집 메리다.




# 진달래 # 미나리 # 쑥 # 벚꽃 # 산수유

# 화전놀이 # 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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