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다낭 여행 중, 근교 도시인 호이안을 가기 위해 딸과 둘이 미리 예약해 둔 택시를 탔다. 오늘 하루 이동을 책임져 줄 택시 기사가 한국말을 상당히 잘하고 유머 감각도 있어서 가는 내내 웃음 짓게 만들어 주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좀 있지만 저처럼 한국말 잘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제가 공부 좀 했거든요”
기사 얼굴에서 자부심까지 느껴진다. 외국인이 한국말 배우기가 무척 힘들다던데 정말 애썼겠다 싶었다.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친구는 부자가 되었는데 전 못 갔어요. 회사에서 직원을 키가 170센티 이상만 뽑아서 한국에 보냈거든요. 제 키가 162센티에요. 결국 포기했죠.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아이고, 속상했겠어요.”
동시에 터져 나온 우리 말에 기사는 이제 괜찮다고 싱긋 웃는다.
호이안에 도착했다. 기사는 우리를 코코넛 잎으로 만든 바구니 배를 타는 곳에 내려 주었다. 강에는 꽤 많은 배들이 사람들을 태우고 떠다니고 있다. 사공이 우리를 위해 뭍에 배를 바짝 붙였다. 이게 배라고? 성인 서너 명이 타면 가득 찰 만한, 그냥 커다란 바구니가 배라니. 미심쩍어하는 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했을까. 사공은 걱정 말라는 듯 으쓱하며 두 팔을 펼쳐 보인다. 그런 다음 능숙한 솜씨로 우리가 배에 타는 것을 도와준다. 사공의 구릿빛 팔 근육이 불끈 움직일 때마다 배가 강을 따라 쑥쑥 앞으로 나갔다. 우리는 물결 따라 흔들리는 배에 몸을 맡겼다. 걱정스러웠던 마음은 저만치 사라졌다. 강의 곳곳에 배를 고정시켜 만든 무대에서 가수가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들려주며 관광객들의 흥을 돋우어 주고 있다.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 걱정했는데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실 만큼 쾌청하다. 뱃놀이하기에 그만이다.
배에서 내린 후에는 다시 택시를 타고 중심부에 있는 올드 타운으로 갔다. 호이안의 올드 타운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옛 항구 도시 호이안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15세기에는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관광객을 위한 먹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야시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길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상점들을 구경하며 걷는 동안 해가 슬며시 저물었다. 각양각색의 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히고 낮에는 볼 수 없었던 활기가 살아났다. 택시 기사가 추천해 준 베트남식 샌드위치인 반미를 파는 집으로 갔다.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하면 빵에 넣어주는데 워낙 유명한 집이라 맛보지 못하고 가면 후회할 거라나.
우리가 근처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는 사람들로 꽤 긴 줄이 서 있는 곳이 보였다. 한 눈에도 기사가 소개해 준 집인 걸 알겠다. 노란 등불이 밝혀져 있는 지붕 아래 반미를 만들고 있는 손들이 분주하다. 고소한 냄새가 내 몸 가득 담긴다. 줄을 서야 하나 갈등하는 동안 점점 줄이 길어진다. 얼마나 맛있기에 그러는지 먹어봐야 할 것 같다. 한참 동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 한 사람이 나오더니 우리 바로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앞으로 보내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앞으로 간 사람들이 하나 둘 음식을 받아들고 나가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은 여럿인데 줄은 하나여서 뒤에 있던 사람들을 안쪽으로 보낸 거였다. 먼저 와서 기다린 사람이 있는데 뭐지? 슬며시 짜증이 인다. 그런데 불평하는 사람이 없다. 불평은커녕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삼삼오오 이야기 나누며 기다릴 뿐이다. 이게 이곳의 여유인가? 이렇게 불합리한 게? 계산대와 음식 만드는 곳을 분리하고 번호표를 주어서 순서가 어긋나는 일 없는 우리나라 음식점이 떠오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소고기 맛과 믹스 맛 두 개를 사서 바로 앞 공터에 마련해 놓은 의자로 가 앉았다. 공터 앞 가게 직원이 와서 메뉴판을 보여 준다. 코코넛과 음료수를 사서 반미와 같이 먹었다. 고소하면서도 감칠맛이 그만이다. 줄 선 보람이 있다. 게 눈 감추듯 금세 다 먹어 치웠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걷고 있는데 한 청년이 우리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온다.
“돈을 내지 않고 가셨어요.”
청년은 우리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아이쿠, 돈 내는 걸 완전히 잊었다. 선불에 익숙했나.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뛰어와야 하나? 미리 돈을 받으면 편할 텐데. 미안한 마음에 시스템 탓을 하며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화를 내도 할 말 없으련만 청년은 마음 좋게 웃어준다. 효율적인 것만 따지던 나는 청년의 너그러운 미소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총총히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길에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서로 부딪히지 않고 걷기 힘들 정도로 복잡해졌다. 강에는 등을 밝힌 배들이 관광객들을 태우고 유유히 떠다니고 있다.
택시 기사를 만났다. 여기는 비가 오지 않았지만 근처 해변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단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미처 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물이 차도까지 차서 웅덩이를 만들고 있다. 택시 기사는 장난스럽게 씩 웃더니 속도를 높여 웅덩이를 빠르게 통과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크게 흔들리고 커다랗고 하얀 물줄기가 택시를 훌쩍 넘어 튀어 올랐다 쏟아진다.
“와! 워터파크다.”
딸의 말에 기사가 호탕하게 웃는다.
“그렇죠? 베트남식 워터파크입니다.”
그동안 빠르고 합리적인 것만 가치를 두는데 익숙해진 채 살았나 보다. 흙탕물에서조차 웃을 거리를 만들어내는 택시 기사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잃어버린 무언가를 만난 듯 여유로워진다.
호텔로 돌아왔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이 정겹다.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원래 같았으면 내일 여행 일정을 걱정했을 터이지만, 이제는 이 예측할 수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베트남식 워터파크’를 있는 그대로 즐길 생각에 그저 즐겁다.
딸과 나란히 창가에 기대앉았다. 창문에 흘러내리는 빗물 너머 야경의 불빛이 은은하게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