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대학원에 다니며 시험을 준비하던 때, 딸은 방학 중에도 거의 매일 학교에 가서 공부를 했다. 그 무렵 어느 날, 딸의 저녁밥 친구를 해주려는 김에 조금 일찍 나가서 학교 근처의 영화관에서 영화도 한 편 보기로 했다.
내 영화 취향이나 관심 같은 것은 미뤄두고 순전히 시간에 맞춰 영화를 찾았다. 광고 문구로 나와 있는 글을 대충 읽어보니 록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 이야기인 듯하다.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 관심이 클래식 음악에만 편중되어 있는 나는 최근에야 대중음악에 비로소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도 특유의 강한 비트로 연주되는 록 음악은 아직도 낯설고 여전히 나에게는 시끄럽기만 하다. 소리에 민감한 내 귀도 걱정되고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잠시 고민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어 이 영화로 결정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록 음악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가는 걸 인식하면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도 가까이 해보려 하는 중이다. 내 색깔만 주장하는 고집불통이 되지 않으려는 작은 노력이랄까.
시간이 되어 집을 나섰다. 영화를 찾을 때 분명 제목을 보고 결정한 일이련만 영화관 근처에 다다랐을 때 영화 제목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려다 그만두었다. 상영관 앞에 포스터가 있겠지. 영화관에 도착했다. 역시 집에서 핸드폰으로 봤던 여자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는 포스터가 보였다. 여자의 얼굴 바로 아래 굵고 멋지게 디자인된 글씨가 씌어있다.
<SHE'S BACK>
나는 당당하게 매표소 앞으로 갔다.
“She's back 주세요.”
“네, 4시 15분에 시작해요. 좌석표 보고 자리 선택해 주세요.”
표를 사고 시간에 맞춰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예고편이 나온 뒤 영화가 시작되었다. 어라? 제목이 'HEDWIG'이네. 내가 잘못 들어왔나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상영관이 딱 두 개밖에 없는데 그럴 리가. 곧바로 내가 봤던 여자의 얼굴이 나왔다. <SHE'S BACK>은 영화 광고 문구였구나. 매표소 직원이 한심한 나의 실수를 알아채고 센스 있게 표를 잘 준 거다. <HEDWIG>은 원래 뮤지컬로 공연이 되었는데 15년 전에 영화로 만들어졌고 이번에 재개봉한 거였다. 그래서 ‘She's back’이었나 본데. 에휴, 고집쟁이가 될 기회도 없이 멍텅구리가 먼저 되겠다. 제목도 잘 모르고 들어온 영화는 내 감정과 상관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질 때 엄마를 따라 동독에 와서 살게 된 주인공 한셀은 미군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록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다. 장벽 너머의 세상을 꿈꾸던 한셀은 자신을 유혹하는 미군 루터를 따라가기로 한다. 루터를 따라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결혼밖에 방법이 없다. 신체검사와 여권이 필요하다는 루터의 요구로 한셀은 성전환 수술을 하고 엄마의 여권 사진을 바꿔 넣은 뒤 엄마 헤드윅의 이름과 여권으로 미국으로 간다. 헤드윅으로 살아가게 되는 한셀의 자기부정의 시작이다. 하지만 수술은 실패해서 그의 남성은 완전히 제거되지 못했다. 28년간 동서를 구분했던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지만, 헤드윅은 남성과 여성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동성애자인 루터는 새로운 남자친구와 떠나고, 헤드윅은 군부대 근처에서 매춘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그곳에서도 쫓겨난 그는 ‘앵그리 인치’라는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며 미군 장교 아기를 돌보는 일을 한다. 이때 장교의 17살인 둘째 아들 토미와 사랑에 빠진다. 풋내기 로커였던 토미는 헤드윅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음악적으로 성장하지만 그의 비밀을 알고 떠난다. 헤드윅이 만든 곡을 가지고 간 토미는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다시 매춘을 하던 헤드윅은 우연히 토미와 만나게 되고, 교통사고로 같이 있던 모습이 언론에 알려진다. 토미는 헤드윅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남자인지도 몰랐다고 부인하지만 그와의 관계를 사람들이 알게 되고 헤드윅의 인기가 급상승한다. 배신감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갈등으로 방황을 계속하던 헤드윅은 어느 날 토미가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본다. 세상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한 헤드윅은 무대로 돌아온다. 무대에 선 헤드윅은 여장했던 가발과 드레스를 뜯어내고 가슴을 볼록하게 보이게 하려고 속옷에 넣었던 빨간 사과를 꺼내어 던져 버린다. 이제 그는 그 자신이 되었다. 모든 것을 벗어 던져 버리고 그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는 온몸을 불사르며 기쁨과 열정으로 가득한 참된 노래를 부른다.
어둠으로 가득 찬 화면에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인다. 알몸인 그의 실루엣에 가느란 빛이 비친다. 예전에 두 개의 조각난 얼굴이 그려져 있던 허벅지의 문신은 지워지고 어느덧 하나의 온전한 얼굴이 되어있다.
뮤지컬 영화답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번쩍이는 의상을 입은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 경쾌한 록 음악 공연 장면이 나왔다. 생각보다 시끄럽지 않았고 선율에 따라 흐르는 노랫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대부분은 노래로 이어졌다.
두 개로 분리된 도시 내가 탄생한 곳
그 거대한 장벽을 딛고서 너에게로 왔어
적들과 고난이 날 무너뜨리려고 해
날 원하면 해보라고 날 무너뜨려봐
내 살이 잘린 악몽의 수술 치솟는 검붉은 피
내 몸을 쑤셔댄 잔인한 너
사람이, 모든 사람이, 적들과 고난이
덤벼봐 어디 덤벼
뱉어, 침을 뱉어 사람이 나를 부수려 하지
꿈꾸던 베를린 장벽 너머 세상으로 왔지만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의 고통과 그로 인해 온전한 자유인으로 살지 못했던 고뇌를 투영시켰을까? 영화는 그 시작과 끝을 ‘분리된 두 도시에서 태어나 장벽을 넘어’온 헤드윅의 노래로 장식했다. 풍성한 머리를 빗어 내리며 예쁜 옷을 차려입고, 가고 싶은 곳에 가는 등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일들을 그는 ‘특별한 은총’이라 말한다. 그런 은총을 받지 못한 그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다. 그 내면의 아픔을 장벽이 무너져 사람들은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로 대신한다.
태초에 인간은 두 쌍의 팔과 다리와 큰 머리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사랑에 대해선 몰랐다. 사랑의 기원전 이야기
그땐 세 가지 성별이 있었다.
등이 닿은 두 명의 남자 태양의 아이, 두 여자 지구의 아이
숟가락에 포크가 겹쳐진 듯 합쳐진 모습의
태양의 아이와 지구의 아이가 합쳐진 달의 아이
노래는 빠르게 지나가고 나에게 대강 들리는 노랫말은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 이야기다. 인간들은 자신의 완전함으로 인해 교만해졌고, 이에 분노한 신이 반쪽을 갈라놓았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혼이 서로의 반쪽을 찾아 하나가 되는 것이라거나 그래서 남자 여자가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많이 들어왔던 친숙한 말이다. 하지만 신화에 따르면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도 자기의 잃어버린 반쪽이라는 건데….
성전환 수술은 실패했지 내 수호천사는 깜박 졸았나 봐
내게 남은 건 바비인형 같은 가랑이뿐. 성난 1인치뿐이야
6인치에서 5인치는 잘리고 성난 1인치만 남았어.
난 여전히 비명이 들리는 그런 나라에서 왔어. 탈출하기 위해 포기한 것도 많아
이름도 바꾸고 여자로 가장했어
기차가 오고 있고 난 트랙에 매달려있어. 일어나려고 했는데 일어날 수가 없어.
엄만 찰흙으로 내 가슴을 만들어줬어. 남자친구는 날 멀리 데리고 가겠다고
어느 날 의사에게 날 데리고 갔어.
짧고도 긴 얘기 짧게 말한 긴 얘기
노랫말 중 ‘짧고도 긴 얘기, 짧게 말한 긴 얘기’는 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남자로서도 여자로서도 살아갈 수 없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온전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고 살아갈 수 없어 자신을 숨기고, 숨어야 하는 삶이다. 말로써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 없는 긴 이야기다. 그래서 헤드윅의 노래는 처절했다. 완벽하게 다른 성이 되지 못한 내면의 불완전성이 일 인치가 남은 불완전한 수술로 상징되었다. ‘성난 일 인치뿐’이라 부르짖는 노래는 절규에 가까웠고 그의 절망들이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절망들을 이겨내고 다시 부르는 헤드윅의 격정적인 노래는 또 다른 불이 되어 모두의 가슴에 뜨겁게 타올랐다.
딸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가볍게 영화 한 편 보러 왔는데 영화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신나는 음악과 화려한 영상들이 교차하며 몰입하게 하면서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영화는 단순히 고통 속에 살아가는 어느 트랜스젠더의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사실 인간의 완성이 성 정체성의 완벽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15년 전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했을까? 그즈음 커밍아웃하고 모든 방송 활동을 그만두게 된 연예인이 요즘엔 TV에서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것을 보면 인식이 많이 달라진 건 틀림없다. 잃어버린 반쪽이 이성이 아닌 사람들을 그저 독특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타고났기에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해해야 하는 건지. 그 마음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건 ‘She's back.', 그녀는 돌아왔다. 그녀의 존재를 다시 알리며. 누군가의 이해가 있든 없든.
오후 공부를 마치고 나온 딸을 만났다. 전날 봐두었던 식당으로 함께 들어갔다.
“엄마, 영화 어땠어?”
내가 영화 제목을 기억 못 해서 She's back 달라고 했다는 말에 딸은 배꼽을 쥐고 웃는다.
“근데 결혼이 불완전한 반쪽 둘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건 어떻게 생각해? 요즘은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도 회의감을 느끼는 것 같던데.”
“그건 아니지, 결혼하지 않으면 영원히 미성숙한 사람이게?”
맞는 말이다. 결혼은 동등하고 성숙한 두 인격체의 만남이어야지. 같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희생이나 양보와 타협들이 좀더 나은 인격을 만들긴 하겠지만.
식사를 끝낸 뒤 딸은 다시 학교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해가 저물었는데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뜨겁다. 더운 날 책과 씨름해야 하는 아이가 한없이 안쓰럽기만 한데 열심히 성숙을 향한 자기 나름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딸의 뒷모습은 힘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