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暗轉)

by 고우니

지난 여름은 유난스레 무더웠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인데 대학에서 뮤지컬 동아리 활동을 하는 딸은 방학 내내 연습한다고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나갔다. 에어컨도 없는 연습실에서 종일 연습하고 파김치가 된 채 돌아와 곧바로 씻고 곯아떨어지는 아이를 보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뭐라 말할 순 없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고생이니 어쩌겠나. 뮤지컬의 내용은 공연 때 봐야 신선할 거라면서 말해주지 않으니 모르겠고 가끔 연습과정이나 완성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니 그래도 고맙다.


공연을 며칠 앞두고 극장에 들어가서 연습을 할 때에는 더 지쳐서 들어왔다. ‘암전 연습’을 한다고 했다. 조명이 꺼진 오륙 초 사이에 무대를 바꿔야 하는데, 모든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에서 빠른 시간 내에 소품들을 옮겨야 하므로 조명 아래서 공연하는 것 못지않게 섬세하고 치밀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공연을 봐왔지만 암전 시간까지 연습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 연습이 어떨지 감이 오지 않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기획, 연출, 무대, 의상에 이르기까지 전부 학생들이 도맡아 하는 공연이다. 내심 가능한 일일까 싶었지만 스무 살을 갓 넘긴 학생들이 동료들, 선후배들과 힘을 합쳐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저 기특했다. 공연의 완성도나 개개인의 실력은 여하간에 그 과정을 통해서 협동하고 양보하는 법,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법을 폭넓게 배우게 될 것이 틀림없다.


드디어 공연 날이 되었다. 삼 일간 총 다섯 번 공연을 한다. 첫 공연부터 보고 싶었지만 감기가 심해 가지 못했다. 둘째 날도 다 나은 건 아니었지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공연장을 찾았다.

극의 배경은 서울의 달동네였다. 소설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상경한 작가 지망생과 멋진 장면을 찍으려고 동분서주하는 미래의 사진작가가 주인공이다. 이 둘이 꿈과 사랑을 찾아 방황하고 넘어지기도 하면서 점차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극인데 스토리 전개가 춤과 노래와 연극 속에 잘 어우러져 있었다. 딸은 극의 재미를 이끌어가는 감초 같은 역할을 맡아 코믹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청중을 웃게 만들었다. 역할은 사소했지만 연기에 임하는 자세는 주인공 못지않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눈에만 보인 건 아니겠지. 주인공을 했어도 잘했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꼭 주인공만 빛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조연이 극을 살리는 경우도 있잖은가. 극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조연이라면 때로는 그게 더 매력적일 수 있다. 딸은 꼭 필요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작은 일에 충실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나로선 외려 감동적이었다. 딸에게 저 경험은 아주 중요한 성장의 계기가 될 것이란 생각으로 가슴이 더워졌다. 순수 아마추어들이지만 열심히 준비했던 만큼 아주 멋진 무대였다.


한 장면이 끝나고 암전이 될 때마다, 몇몇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일행들과 짧은 담소를 나누느라 주변이 소란스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이제껏 어떤 공연도 환한 조명 아래 펼쳐지는 무대 위의 장면에만 관심이 있었지 암전 시간까지 염두에 두고 본 일은 없다.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어두워지면 배우들이 쉬는 시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딸이 암전을 준비하면서 어려움을 이야기했던 터라 나도 긴장이 되었다.


무대를 밝게 비추고 있던 조명이 다 꺼져버린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 어둠 속으로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덜컹거리는 소리 하나 없는 고요와 모든 빛이 지워진 어둠. 무대 뒤에서는 이전에 있었던 테이블과 의자들을 옮기느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넘어지지는 않는지 걱정하며 무대 뒤의 움직임에 집중해 보았다.

영화가 시작된 뒤 극장에 들어가면 어둠에 익숙해지기까지 한참이 걸려 걷기도 쉽지 않다. 공연하다 불이 꺼지고 그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 소품을 옮기는 일은 훨씬 어려울 것이다.

다음 무대는 어떤 모습일지, 소리 없는 움직임 속에서 변화하고 있을 무대의 모습을 상상하니 암전 시간도 재미가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무대를 바꾸기 위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뛰고 있을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수고가 느껴졌다. 이제 막 대사를 마친 친구의 홀가분하고 즐거운 미소와 다음 장면에 출연하는 배우의 설렘과 분주함 등, 여백인 줄만 알았던 짧은 시간에도 표정이 있었다.

다시 불이 켜지고, 깜짝 놀랄 만큼 변화된 다음 장면이 나타났다.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박수를 보냈다.

새로워진 무대보다 그 무대를 만드는 수고로움에 대하여 더 오래 생각한 암전 시간이었다.

공연을 마친 딸은 팔다리 여기저기에 퍼렇다 못해 검붉은 멍을 훈장처럼 달고 들어왔다. 꽤 많이 아팠겠다. 멈춤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암전 시간은 다음의 멋진 무대를 만들기 위해 아파도 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침묵의 시간이었다. 관객들은 어둠 속 잔잔한 음악에 취해 있었겠지만.

삼 일간의 공연이 모두 끝나고 배우, 스태프 등 함께했던 모든 학생들이 무대로 나와서 울고 웃으며 서로를 다독여 주었다. 수고로웠던 시간을 같이한 끈끈한 우정과 무사히 끝낸 것에 대한 안도감과 자부심, 여러 마음들이 무대를 가득 채운 듯 보였다. 찬란한 빛이 있기 전 어둠이 필요하다고 한다. 공연장의 조명과 암전이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생명은 이렇게 푸른 빛을 뿜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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