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딸의 뮤지컬 공연이 시작되었다. 대학교 시절 몸담았던 뮤지컬 동아리 친구들이 졸업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할 일을 하다가 다시 뭉쳐서 만든 공연이다. 정식으로 극단을 창단하고 무대를 올린 것으로, 프로 데뷔인 셈이다. 한 달여의 준비 작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간 수 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준비했다. 동아리에서 하던 것처럼 시나리오부터 음악까지 모든 것이 다 창작품이다. 약간의 미숙함이 다 이해되던 동아리 활동 때와는 달리 준비하는 과정도 더 힘들고 부담감도 훨씬 컸다. 옆에서 보기에도 배우, 스태프들 모두 그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 일 동안 총 여섯 번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나는 첫 공연을 시작으로 내리 세 번을 보러 갔다. 첫날도 무리 없이 잘했지만 공연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배우들의 표정이나 노래가 더욱 안정되고 무대 조명이나 음향도 점점 나아졌다. 뮤지컬 팬들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같은 공연을 몇 번씩 보러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딸이 나오는 세 번의 공연은 지루하거나 식상하기는커녕 매번 볼 때마다 재미가 있었다. 공연을 볼수록 배우들의 대사나 노랫말이 주는 의미가 더욱 깊어지고 새롭게 다가왔다.
뮤지컬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전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과학자들이 기억 속의 행복한 날을 찾아주는 연구를 시작하고, 드디어 신약 ‘드리머’를 발명하게 된다. 하지만 이 약은 장기 복용하면 현실을 잊고 꿈속을 헤매다 종국에는 아주 깨어날 수 없게 되는 부작용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언니를 잃은 연구소장 시에나는 약의 부작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사실을 감추고 몰래 자신도 약을 먹으며 계속 언니와 함께하는 꿈을 꾸다 결국 꿈속의 언니를 찾아가는 길을 택하고야 만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약을 복용하던 로즈윌로는 자신을 아끼는 친구의 도움으로 현실로 돌아온다.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이유는 하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은 채.
스토리도 탄탄하고 음악도 너무나 훌륭했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십 대 중후반 친구들이 만든 게 맞나 싶게 순간순간 전율이 일었고, 코믹한 장면에서는 미소가 흘렀으며, 슬픈 장면에서는 코끝이 시렸다. 열정에서나 능력에서나 정말 대단한 젊은이들이다. 딸의 역할은 과학자 시에나였다. 사실 나의 눈과 마음은 극의 내용이나 훌륭한 음악보다는 딸의 움직임만 따라가고 있었다. 딸은 가끔 집에서도 연습하며 내게 노래를 들어보라고 했다. 조금씩 조언도 해주며 연습 시간을 함께했기에 나는 딸이 어느 부분을 자신 있어 하고 어디가 약한지 잘 알고 있다. 취약한 지점이 다가오면 신경이 곤두서고 손에 땀이 나는 것이 공연을 하고 있는 딸보다 내가 더 긴장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딸은 매 공연을 야무지게 해냈다. 무대 위에서 딸은 빛이 났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느 아름다웠던 순간들, 아쉬운 추억들을 떠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현재가 아쉽고 미래가 절망적일수록 과거는 희망을 찾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시에나가 과거에 사는 사람이지만 사실 그 어떤 누구도 과거에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현재를 있게 한 것은 과거의 나이고 현재를 아름답게 하는 것도 역시 과거의 나일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과거의 나를 바탕으로 새로운 나를 찾아 나가는 여정이겠다.
사실, 이 뮤지컬을 준비할 당시에 딸은 응시했던 변호사 시험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상황이라 참여 여부 자체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연습 도중 불합격 결과가 나와 팀원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한참을 걱정하다가, 팀에 미리 양해를 구한 후에야 합류했다. 다행히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우리는 하루에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사실, 딸은 공연 준비를 위해 많은 신입 변호사들이 입사를 원하지만 긴 근로시간을 요구하는 대형 로펌 도전은 포기해야 했다. 동기들이 일찍부터 치열하게 앞날을 준비하는 동안 딸은 그렇게 뮤지컬에 전념했다. 그 시간이 변호사로 살아갈 인생 항로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고생해서 얻은 자격인 만큼 앞날을 위해 매진하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변호사의 입지나 취업시장 등, 새롭게 다가온 현실이 생각보다 밝지만은 않기도 하고. 하지만 모든 것을 다 비우고 공연에 매진하는 딸이 보기 좋았다. 딸이 자신의 삶에 길이 남을 아름다운 순간을 진심을 다해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극에서 던진 ‘당신은 언제가 가장 행복했나요?’라는 질문을 나에게 하면서 내 머릿속이 바쁘게 지나갔다. 글쎄, 난 언제 가장 행복했을까. 머뭇거리는 동안 어떤 게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조차 생각해보지 못하고 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행복한 걸까 불행한 걸까. 뮤지컬을 보는 내내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하는 것들이 많아야 그만큼 행복한 일도 많다는 극 중 대사가 귀에 쏙 들어왔다.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주변을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어쩌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생각을 해보면서 젊은 친구들이 내게 해 준 이야기를 마음에 새겼다.
호기심도 줄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도 망설여지는 요즈음이다. 그래도 과거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겠지. 사랑할 것들을 새롭게 만들어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