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뮤지컬 보러 갈까? 난 봤는데 엄마도 보여주고 싶어서. 나도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하고. 소극장 공연이고 배우들도 세 명뿐이라 화려하지는 않아. 하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야.”
“고마워라.”
나는 뮤지컬이 어떤 내용인지 배우는 누구인지 애써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저 딸이 나를 위해 마음 써줬다는 것에만 고맙고 마음이 들떴다. 딸이 바로 예약을 하려는데 유명 배우가 나오는 공연은 벌써 전석 매진이고 남은 공연도 이 층 좌석밖에 없단다. 그나마 옆에 나란히 앉지도 못하는 좌석으로 예매했다.
공연장에 도착했다. 이 층 좌석은 경사가 심해서 조심스럽고 의자도 딱딱해서 불편했다. 대신 앞사람 때문에 시야가 방해되는 것 없이 무대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오케스트라를 무대 이 층에 배치해서 시선 정면에서 연주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팔이 하늘을 향해 춤을 추듯 가볍게 오르나 싶더니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첼로의 선율이 그 뒤를 따른다. 가느다란 조명등 불빛이 무대 중앙을 향해 꽂히고 뒤이어 무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쓸모가 다하여 버려진 구형 로봇 ‘헬퍼봇’들의 이야기다. 우편배달부 외엔 찾는 사람이 없는 낡은 아파트는 수명이 다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헬퍼봇들의 아지트다. 구형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는 이 아파트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며 살아간다. 클레어는 고장 난 충전기 때문에 도움을 청하려고 이웃집 문을 두드리다 올리버를 만난다. 둘은 충전기를 주고받으며 지내다 어느덧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된 올리버와 클레어는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행복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둘은 로봇이기에 자신이 어떻게 프로그래밍이 되어있는지, 문제점은 무엇인지,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다 알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한시적이라는 것, 치명적 결함을 가진 클레어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반면, 올리버에게는 너무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클레어가 사라지고 홀로 남겨질 올리버를 위해, 올리버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클레어를 위해, 둘은 결국 서로를 위해 사랑했던 기억을 없애기로 한다. 그 후 여전히 올리버는 클레어를 돕고 클레어는 올리버의 도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으로 공연은 끝났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끝이 없는 생이란 없다는 건 누구나 잘 알지만, 그 끝을 알고 있다면 진심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게 사랑하는 상대의 끝이라면…. 클레어는 자기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죽어가야 할 올리버의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올리버 역시 자신은 돌볼 겨를도 없이 오직 클레어의 몸이 망가져 가는 것에만 가슴 아파한다. 먼저 떠나야 하는 클레어가 올리버에게 ‘그만하자’라는 말을 먼저 건넸을 때 올리버가 동의한 이유도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라보며 힘들어하는 클레어를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사랑 이야기는 나이와 상관없이 가슴 설레게 하는 힘이 있나 보다. 공연 내내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에 가슴 아파하고 마음 졸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의 젊은 날의 사랑은 어땠나,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누군가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고…. 하기야 젊은 날의 피 끓는 사랑만 사랑이던가. 곁에서 말없이 지켜주고 배려해주고 내 편 들어주는 마음들이 다 사랑이지.
그런데 저 둘이 기억을 다 지우긴 한 걸까? 올리버는 기억을 지우지 않았나 보다. 그러니까 극의 마지막까지도 저렇게 최선을 다해 클레어를 도왔겠지. 행복한 기억도 이별의 고통도 없는 이를 혼자서 사랑하고 돌보다니. 사랑하는 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게 사랑이라지만 그래도 사랑한다면 아픔도 같이해야 하는 거 아닌가? 먹먹해진 가슴을 내려놓지 못한 채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딸과 만났다.
“속상하다, 올리버 불쌍해.”
“그치? 근데 엄마, 이 뮤지컬 특징이 결론이 정해져 있지 않은 거래. 배우의 연기나 보는 사람의 상상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거지. 둘 다 기억을 지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클레어만 기억을 지우지 않았을 수도 있는 걸로. 엄마 생각처럼 올리버만 기억을 지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다시 한번 올리버와 클레어의 모습을 되짚어 보았다. 막이 내릴 때까지 그 둘은 사랑을 알기 전처럼 무심한 듯 서로 의지하고 배려하며 지내고 있었다. 둘 중 누가 그들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을까? 혹시 둘 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지 못하도록 행동한 건 아닐까? 하긴, 그들의 시간을 누가 기억하고 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둘 다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고통에 더 아파했고 자신보다 더 상대방을 사랑했다는 것. 상대의 고통까지도 품은 진정한 사랑 표현이었다는 것. 그러니까 그 길을 택한 그들 둘 다 ‘어쩌면 해피엔딩’.
문득 배우들에게 생각이 머물렀다. 유명 배우는 아니라지만 고운 목소리에 연기도 훌륭했다. 그런 무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까. 좋아서 하는 일이 하필이면 음악이어서, 하필이면 예술이어서…. 애잔한 마음이 가슴 한 자락을 쓱 훑고 지나간다. 아름다움의 극치는 슬픔이라던 K선생의 말이 이제야 확 와 닿았다. 어쨌건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인 게 틀림없지. 이 길을 택한 배우들도 ‘어쩌면 해피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