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살이처럼

by 고우니

그간 뮤지컬 공연에서만 활동해 왔던 있는 딸이, 어느 날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연극을 하게 되었지만 딸 역시 연극이 처음이었던 터라, 노래와 춤이 있는 뮤지컬과 달리 오로지 배우들의 대사로만 극을 이끌어가야 해서 내가 보기에 재미가 없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걱정 마. 나는 내 딸이 아무것도 안 하고 무대를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음악이 있는 뮤지컬, 오페라만 주로 찾게 되고 연극에는 도통 관심이 없어서 그동안 연극관람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 손꼽게 유명한 연극배우의 극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그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했다.


드디어 딸의 연극 공연 날이다. 친구와 같이 공연 관람을 하기로 했다. 막 비가 갠 뒤의 하늘은 맑고 상쾌했다. 오랜만에 휴식을 얻은 듯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잠시 후에 도착한 친구와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플라스틱 러브>라는 제목의 극인데, 이 세계의 창조주가 플라스틱 수조 안에 우주를 담아 키운다는 설정이 신선했다.


수조 안 우주에서는 신의 피조물 ‘물살이’들이 헤엄치고 있다. 그들은 신의 설정값에 따라 무엇이 될지, 누가 될지 결정된다. 그러던 어느 날, 신이 한 물살이에게 푹 빠져버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겪는 신은 당황했고 물살이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만들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데 미숙한 신은 실패를 거듭한다.


그러다 신은 깨닫게 된다. 사랑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있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는 사람에겐 한낱 귀찮은 잔소리거나 버거운 참견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사랑이란 자신의 감정을 상대에게 강요하거나 통제하는 게 아니라 공존과 배려,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딸은 고등학생과 엄마, 1인 2역을 소화해야 하는 ‘물살이’였다. 발랄한 학생 역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단한 삶에 찌든 중년 여인의 역할을 넉살 좋게 해냈다.

공연이 끝나고 친구와 저녁도 먹고 차도 마시며 공연 뒤의 여운을 즐기다 집으로 들어왔다.


사실 연극 공연을 하게 되기 얼마 전에 뮤지컬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열심히 준비한 딸의 뮤지컬 공연이 한 달 남짓 남았을 때였다. 아침까지도 밝은 얼굴로 연습하러 갔는데, 저녁에 들어온 딸의 얼굴이 칠흑빛으로 변해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응, 공연 취소됐어. 어떻게든 공연은 올려보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전날까지 열심히 연습했는데 갑자기 취소라니. 그것도 연출진들의 일방적인 통보였단다. 그동안 공연 팀원들 간의 의견충돌로 마음고생을 많이 하면서도 극을 끌어가기 위해 딸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잘 알고 있던 나는 황당했다.

딸은 이 일로 사람에 대한 상처를 많이 받아서 공연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까지 했다. 딸을 아끼는 친구들은 딸에게 당분간 공연은 잊고 쉬라고 했단다. 딸도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아 했다. 나도 할 말이 없어 그저 딸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다.


다음날 풀이 죽어있는 딸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지금 이대로 쉬면 언짢은 기분에서 계속 머물게 될 거니까 얼른 다른 공연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상처를 준 사람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멈추거나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앞으로 더 나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그때마다 포기할 수는 없는 거다.’ 대충 이런 말들이었던 것 같다.


나의 말에 공감한 것일까? 한결 밝아진 딸은 며칠 뒤 가장 빠르게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공연을 찾아 오디션을 봤다. 그런데 이번엔 연극 공연이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연극 공연 도전이라니. 빨리 기분 전환하고 싶은 마음에 장르도 구분하지 않은 건가? 다른 때에 비해 열정도 부족했고 연습 시간도 부족했을 터인데 다행히 오디션에 합격했다. 연습이 시작되고 하루하루 지나면서 딸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전 경험으로 인한 상처가 깊었던 탓인지 딸은 연습이 무르익어가고 공연 날이 가까워 오는데 누구에게 알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다행히 무사히 공연이 시작되었고 그간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무대 위 딸의 모습은 행복하고 빛나 보였다.


딸은 마지막 회차 공연을 마치고 밤늦게 두 손 가득 꽃다발과 케이크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배우님, 어서 오세요.”

나의 넉살에 딸은 함박웃음으로 대답한다.

“배우 어머님, 배우 딸 공연 잘 마치고 왔습니당.”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식탁에 놓으며 딸이 말한다.

“야식 같이 먹어 줄 사람~~.”

“저요!”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공연하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온 딸이 야식 먹자는 데 나야 무조건 오케이다. 밤 12시가 넘도록 케이크를 먹으며 딸과 공연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엄마, 고마워.”

“뭐가?”

“계속하라고 말해줘서. 상처받아도 쉬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일 계속하라고 말해줬잖아.”

딸은 지난번 내가 해줬던 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번 공연은 순전히 엄마 덕이야. 엄마 아니었으면 정말 난 오래도록 힘들었을 것 같아. 공연하면서 내가 공연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게 더욱 느껴지더라. 연극에 관심 없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덤빈 거였는데, 이번 기회에 연극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네. 덕분에 연극도 사랑하게 된 것 같아.”

“그래. 애썼다. 내가 내 딸을 알지. 그나저나 사랑하는 게 하나 더 늘었네.”

덩달아 나까지 연극에 관심이 생겼으니, 딸 덕분에 나도 사랑하는 게 늘은 셈이다.


딸은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연극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연극 <플라스틱 러브>에서 말하고 싶었던 게 사랑의 지속성인 것 같다. 좌절하고 또 좌절해도 그 사랑을 거두지 않고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결국 사랑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시 찾아온다는 걸. 형태를 바꾸며 자유롭게 헤엄쳐서 신을 만나러 오는 물살이처럼.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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