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쓴 희곡 《낯선 연인》이 연극 공모전에 당선되어 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대학 수업 때 과제물로 냈던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했단다. 딸은 공연팀의 총 책임자이자, 작가 겸 연출가가 되었다. 그간 배우로만 공연에 참여했을 뿐, 연출 경험은 전혀 없던 딸의 새로운 도전이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딸이 희곡을 쓴 건 그러려니 했지만, 연출은 공연 전부를 책임지는 일인데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딸은 배우 오디션과 스태프 섭외 등 준비 작업을 차곡차곡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후 수개월 동안 배우, 스태프들과 함께 평일 저녁과 주말을 반납했다.
그동안 배우로 무대에 서 있는 딸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번 공연은 무대에서는 딸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책임자로서의 수고가 느껴져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 마음이 쓰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진심으로 응원하는 일뿐이다.
다른 때와 달리 주변 모든 지인들에게 공연을 알렸다. 딸의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주는 지인들을 만나기 위해 총 아홉 번의 공연 중 네 번을 보게 되었다.
공연 시작 전 객석에 앉았다. 딸이 직접 출연하는 공연보다도 더 떨린다. 드디어 공연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멘트와 함께 무대가 밝아졌다.
극중 배경은 인간관계에 대한 기억이 점점 사라지는 ‘관계망각증’이라는 병이 창궐한 세상이다. 이 병에 걸리면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점점 사라지고 모든 기억이 사라지면 종국에는 소멸하게 된다. 소멸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사람을 찾아서 사라진 기억의 자리에 채워 넣어야 한다. 급기야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보험회사가 생겨나고 ‘은영’은 그 회사 직원으로 일한다. 은영이 일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오랫동안 홀로 남겨졌던 은영의 엄마는 소멸하고, 회의감이 든 은영은 생존을 위해 무의미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을 멈춘다,
엄마의 흔적을 들고 납골당에 온 은영은 그곳에서 ‘인호’를 만난다. 인호는 모두가 잊고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아무도 사지 않는 인물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다. 서로 진실된 대화를 나누던 은영과 인호는 사랑에 빠진다.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문득 인호는 은영이 엄마의 기억을 잃은 것을 알게 된다. 둘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은영의 소멸이 빨라질 것을 인식한 인호는 은영과 거리를 둔다. 하지만 은영은 오직 인호만 생각할 뿐이다.
어느 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음을 깨달은 은영이 인호를 찾아온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며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인호가 잠든 사이 은영은 소멸한다.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한 채. 잠에서 깬 인호는 은영의 온기라도 붙잡고 싶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러있다.
인호는 갤러리를 열고 은영의 사진을 전시한다.
연극은 인호의 전시회를 찾아온 기자 ‘지윤’이 인호를 취재하면서 은영의 이야기를 듣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연극을 보면서, 이제껏 살아오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지금 내 옆에 남아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꽤 긴 시간 함께 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무심함 때문에 관계가 끊어진 친구들도 아스라이 스쳐 간다. 나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누군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나. 세상 속에는 존재하고 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잊혀졌다면 이미 그에게는 소멸된 존재임이 틀림없다. 모두를 기억하거나 모두에게 기억될 수는 없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지는 않아야 할 텐데.
사회는 더 복잡해지고 세분화되어 한 사람의 존재는 미약해지고 파편화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소멸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일까? 실생활에서의 만남으로는 부족함을 느끼는 탓인지 가상공간의 만남이 일상화되어 있는 요즈음이다. 사람들은 가상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를 보여주고 가상 친구들과의 인맥을 과시한다. 이렇게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애쓰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아니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관계망각증에 걸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소멸이 두려워 진실과 관계없이 더 많은 사람들로 주변을 가득 채워놓아야 하는.
은영이는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인호는 ‘빛’이었다고 대답한다. 빛이 없다면 어떤 카메라도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문득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어느 한순간이라도 누군가에게 빛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은영에 대한 마음을 적어 놓은 인호의 메모가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 기억을 안고 낯선 세계로 떠난 사람. 아마도 나의 얼굴을 가지고 떠났을 사람. 그러니 내가 뒤따라갈 낯선 세계 역시, 온통 너의 얼굴이기를.
은영이가 인호에 대해 하는 말에는 마음이 아프면서도 따스해진다.
아름답고, 약하고, 아프고, 덧없고, 슬픈,
사라져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
모든 장면이 끝났다. 잠시 침묵 속의 어둠이 흐른 후, 조명이 한 곳에 내리꽂혔다. 불빛 아래 카메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가난한 예술가였던 인호도 끝내 소멸되고 말았나? 은영이가 있는, 낯설지만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세계로.
아! 빛이다. 카메라를 향해 내려오는 빛. 빛이 카메라를 살리듯, 나를 살게 하는 빛은 무엇인가 하는, 나를 향한 질문.
딸이 글을 쓰고 연출했다지만 네 번이나 공연을 보는 건 무리가 아닐까 했는데 아니었다. 매회 새롭게 느껴지는 감동이 나를 설레게 했다. 모든 게 새파랗게 아름다웠을 이십 대의 딸이 관계망각에 대해 생각했다는 게 놀라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해서 연기라기보다 그냥 진짜 그 인물들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행복한 미소를 보며 같이 웃음 짓고 이별을 두려워하는 이슬 맺힌 눈망울에 같이 울었다.
하기야 어느 누가 사람과 관계 맺음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리 각박해진 세상이라지만 아직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살고 싶게 하는, 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