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좋긴 좋구나, 싶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출판 기념회에 무작정 따라왔는데 행사 초대가수로 최백호가 나왔다. 허연 머리에 찢어진 청바지가 조화롭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음성이다. 이 가수는, 어쩌면 생을 다하는 날까지 노래할 것 같다. 오랫동안 음악을 한 사람들에게는 비슷한 이미지가 있는 것인지 열창하는 가수의 모습에서 드럼 선생의 얼굴이 겹친다.
전주에서 살 때 어느 날부터인가 무대에 서게 되었다. 무대에 덩그러니 혼자 올라가 피아노를 치거나 노래하는 것이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앙상블이 가능한 악기를 해보고 싶었다. 바이올린, 클라리넷, 색소폰, 기타 등 여러 악기를 생각해보다 문득 TV에서 젊다 못해 새파란 청년들이 흥에 겨워 드럼을 연주하던 생각이 났다. 얼핏 보기에도 드럼은 가장 나를 닮지 않은,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악기였다. 음악을 좋아한다 해도 드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아줌마에게도 드럼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긴 하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커져가는 ‘멈칫 병’이 도졌지만, 아줌마만 가질 수 있다는 ‘뻔뻔 병’ 이란 것도 있지 않은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그 무렵 기타를 배우고 있던 친구가 알려준 드럼 학원을 찾아가 보았다. 학원은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컴컴해서 음산하기까지 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곳에 있던 드럼 선생은 새까만 피부에다 바싹 야위어서 날카로워 보였다. 이 방 저 방에서 연습하는 소리들 때문에 대화도 큰 소리로 해야 했다.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나는 당혹스러웠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이윽고 선생은 비어있는 방으로 나를 데려가서 드럼을 보여주며 한번 앉아 보라고 했다. 동그란 의자에 앉았는데 발판에 오른발 왼발을 올려놓으란다. 이런, 배우고 싶다고 찾은 악기가 두 손 두 발을 다 사용하는 악기인 줄도 몰랐다. 두 발이 움직이는 것은 보지 못하고 드럼이 그저 두 손으로만 연주하는 악기인 줄 알았던 것이다. 낯설고 어색한 악기, 드럼 배우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친구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림 그리는 친구의 말이, 사실화 작가와 추상화 작가가 친해지기가 어렵다고 한다. 서로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나.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도 같은 음악인데 쉽게 만날 수 없는 거리가 있는 것인지, 거의 정박자로 이루어진 음악에 맞춰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던 내게 드럼에서 표현되는 엇박자들은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두 손 두 발을 움직여 리듬 박자를 맞추며 다른 악기들이 잘 노닐 수 있도록 기둥을 세우고 있는 이 악기가 그런대로 매력이 있었다. 적어도 혼자 연주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느새 나는 드럼을 치는 즐거움에 빠졌다. 어느 날 드럼 선생은 나를 불렀다.
“애란 씨, 나랑 같이 음악 하지 않을래요?”
내가 피아노를 오랫동안 쳤던 것을 알고 나를 눈여겨보았나 보다.
“죄송해요. 클래식 피아노만 해서 재즈는 잘 알지 못해요. 게다가 무대공포증이 있어서 놀이로 무대 서는 것도 힘이 드는데, 프로 선생님들이랑 멤버를 하라니. 안될 말이에요.”
혹여 피해를 끼칠까 싶어 거듭 사양을 했지만, 선생은 내게 재즈 피아노 선생을 소개해 주고 훈련을 받게 했다.
“일단 편하게 공부하세요. 기다릴 터이니 언제고 마음이 나면 같이 음악 하게요. 가스펠 밴드로 찬양 봉사도 하며 삽시다.”
선생은 내가 학원에 왔을 때 피아노 연습도 편히 하라며 키보드를 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손수 MR을 만들고 친구에게 부탁해서 내 노래가 담긴 녹음 CD까지 만들어 주었다. 나는 한동안 학원에 가면 드럼과 피아노를 오가며 연습했다. 그러다 소음에 약했던 내 귀가 드럼의 큰 소리를 감당하지 못해 아프기 시작해서 더 이상 드럼은 칠 수 없게 되었다.
떠밀려 재즈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재즈 피아노 공부도 끝이 났다. 드럼 선생은 서울에 가서도 음악 공부를 계속하라고 하며 나를 놓지 않았지만 나는 이사를 핑계로 선생에게서 손을 빼었다. 그러면서 막연히 이제 다시는 나에게 그렇게 손 내밀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이사 온 뒤 낯선 교회를 출석부 도장 찍는 느낌으로 심드렁하게 다니다, 성가대에 들어갔다. 그날은 찬양 대회까지 준비하느라 주일 오후 예배 마치고 다시 모여 연습한단다. 잠시 집에 들러 쉬는 데 드럼 선생을 소개해 주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애란아, 어젯밤에 드럼 선생님이 돌아가셨어.”
순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지만 이내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수화기를 잡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쓴 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간다. 나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던 굵은 지지대 하나가 뚝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게 삶의 에너지가 된다는 걸 알게 해준 선생인데…. 전화라도 자주 드릴 것을…. 모든 게 후회가 되어 나에게 달려든다. 가는 길이라도 배웅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몸을 추스르고 전주로 향했다.
선생은 무대 연주를 마치고 심장마비로 떠나셨다고 한다. 이제 겨우 육십인데. 그렇게 가실 것을 알기라도 했나. 내게 입버릇처럼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연주하다 떠나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 소망은 이루었네. 드럼 치고 싶어서 어떻게 떠났을까. 평생 매일 일곱 시간 이상 드럼에 매달려 있는 선생께 그렇게까지 열심히 연습할 것 있느냐고 타박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선생이 하는 대답은 비슷하게 돌아왔다.
“드럼에 앉아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래서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하고 싶은 음악 실컷 하고 살아서 아쉬움이 없거든요.”
나는 선생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여한이 없을 수가 있지? 여러 가지 역할에 치어서 조금씩은 하고 싶은 것도 양보하고 살아지는 게 우리의 인생살이인데, 그건 너무 이기적인 삶이 아닌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여한이 많아 아직 못 죽겠다는 말로 삐죽이곤 했다.
너무 갑자기 떠나버린 안타까움은 여전히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래도 그 여한이 없다는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된다. 나도 언제 갈지 모르니 이제부터 여한이 없다고 말을 해둬야겠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덜 아플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여한 없게 살았다 하지? 하긴, 따지고 보면 ‘죽어도 못 죽겠다’ 할 만큼 사무친 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여한 없이 살려 할 것도 없겠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설움이 더해요~“
최백호의 노래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선생이 떠난 날이 눈물겹게 아름다운 깊은 가을날이었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는 거라는 말이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선생이 아직도 연주하고 있는 듯 나는 오늘도 선생의 드럼 소리를 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