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내기

by 고우니

전주시 전동 000-0.

내가 이 주소의 집을 떠나온 지도 28년. 그러니 이제 그건 내 집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건 아직도 내 집이다. 결혼하면서 집을 떠난 뒤 전전했던 여러 아파트들의 동, 호수는 벌써 잊혀 기억나지 않는데, 옛 친정집 주소만큼은 주민등록번호처럼 저절로 뇌어지는 것을 보면.


내가 그 집에 살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이었다. 아버지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당시 전주 최고의 번화가였던 도청 바로 앞에 터를 잡고 병원과 살림을 겸할 수 있는 구조로 집을 지었다. 아버지가 설계부터 직접 참여하고 벽지와 전등은 엄마가 손수 골랐다. 대로변으로 나 있던 내 방 창문을 열면 도청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광장에선 크고 작은 행사가 자주 열렸다. 사월 초파일엔 연등 행사가 열리고, 단오에는 전주의 대표적인 전통 문화 축제인 ‘풍남제’가 열리고…. 그런 날엔 광장에서 탈춤이나 전통무술이 상연되거나 풍물놀이패들의 흥겨운 공연이 이어졌다. 광장을 가득 메운 풍물놀이패들의 풍악소리와 광장을 에워싼 구경꾼들의 함성은 높이높이 메아리치면서 내 방 창문까지 그득히 밀고 들어왔다. 북과 장구와 징의 울림이 먼 바다를 건너듯 출렁거렸고, 꽹과리 소리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인 듯 쨍! 내리꽂히는가 하면, 태평소가 허공 높이 날아오르는 새인 듯 명랑한 가락을 뽑아냈다. 그 소리들은 구경꾼들의 추임새와 박수와 함성과 마구 뒤섞여 버무려지면서 소리의 바다를 이루었다. 눈을 감으면 짙푸른 바다와 질풍노도하며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내 심장 안으로 달려드는 듯했다.


그렇다고 그 광장에 늘 축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창은 때때로 강제로 닫히고 커튼까지도 내려야 했다.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고 다니며 광장 옆에 있는 건물들의 창문을 모두 닫고 커튼을 내리게 했다. 높은 사람이 온다고 경호를 해야 한다나. 얼마나 높기에 경호를 내 방 창문이나 우리 집 옥상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럴 때 커튼을 내린 내 방에는 우리 사 남매가 모여 창밖의 기척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뭔가 은밀한 우리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을 것처럼. 하지만 대부분 밖은 적막감이 들 정도로 고요했고 커튼을 열어도 된다는 안내도 없이 하루가 지나곤 했다.


우리가 때때로 밤늦은 시간에 모여 모종의 작당을 했던 공간도 내 방이었다. 작당의 주모자는 대부분 큰오빠였다. “오늘 우리 야식 먹을까?”라거나 혹은 “우리 만화책 빌려 볼까? 돈은 내가 낼 터이니 둘째 네가 심부름을 해라”하는 식이었다. 나는 여자라 빼주고, 남동생은 어리다고 빼주고, 용돈이 제일 많은 큰오빠가 돈을 냈으니 결국 심부름은 둘째 오빠의 몫이었다. 사실 넷 중 가장 순한 둘째 오빠는 온갖 귀찮은 심부름을 도맡아 하면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했다. 어른들 몰래 나간 둘째 오빠가 들어올 때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내 방 창문을 두드리면 나가서 문을 열어주는 게 내 일이었다.


큰오빠는 서울로, 동생은 광주로 대학을 가느라 일찍 집을 떠나고 남아있던 둘째 오빠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면서 그 집을 떠났다.

얼마 뒤, 큰오빠가 돌아왔다. 나보다 1년 먼저 결혼해서 서울에 살던 큰오빠가 수련의 생활을 전주에서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 방까지 병원을 넓히고 병원 뒤로 이 층 벽돌집을 지어 이 층을 오빠 내외에게 내주었다. 큰오빠는 수련의를 마치고 내과 전문의가 된 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의원에서 같이 일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꽤나 흐뭇해하셨다. 조카아이들 둘이 그 집에서 태어났고, 집은 식구들과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다.


조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전주 외곽지역에 대규모의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새로 지은 아파트로 옮겨가고 친정집 주변은 구시가지가 되어버렸다. 얼마 후 도청도 신시가지로 이전했다. 두 조카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여 집을 떠나고 큰오빠 내외도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때 오빠는 부모님을 모시고 갈 생각이었지만 두 분은 아파트로 가길 거절했고 결국 집에는 부모님만 남게 되었다. 집안일을 돌봐주던 할머니도 이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집을 떠났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대학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5년여 전부터 요양병원에 장기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큰오빠도 다른 병원으로 일터를 옮기고, 이제 집에는 엄마만 남았다. 엄마는 매일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출근하다시피 들렀다가 해가 저물녘에야 집으로 오셨다. 엄마가 집에 가려고 일어서면 아버지는 으레 반입속말로 웅얼거리셨다.

“빈집에 뭐 하러 혼자 들어가 잔대? 여기서 같이 있으면 좋을 것을.”

그때마다 엄마는 발끈했다.

“아니, 뭐 하러 가다니요?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인데.”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은 무슨….”

아버지는 텅 빈 집에서 홀로 밤을 보낼 엄마를 걱정하셨다. 병실을 나서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쓸쓸하다. 어쩌면 집에 갈 수 없는 아버지에게 엄마는 아버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 오래된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곤 했을 엄마. 식구들은 다 떠나고 그 흔적들만 빼곡한 공간으로 들어서실 때,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이 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은 엄마가 부지런히 청소를 하는데도 반질반질하던 그 빛을 잃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수시로 드나들던 병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문은 이제 굳게 닫혀 있다. 조카들이 보다가 남겨놓은 책들이 가득한 방, 빈 소파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거실을 지나면 안방이다. 엄마의 집은 안방 하나뿐이라는 듯, 엄마는 안방에만 보일러 불을 들이셨다. 엄마는 정말로, 혼자 그 집을 지키셨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집에서 지낼 수 있었던 시간마저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았다.


몇 달 전 엄마는 아버지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셨다. 아직 건강한 몸으로 입원환자의 신세가 돼버리고 말았으니 속이 상하셨을 터이지만 담담하셨다.

“밥걱정 안 하고 살게 되었으니 나쁠 것도 없다.”

그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지난겨울 엄마는 나더러 그 집으로 오라고 하셨다. 그 집은 너무 썰렁해서 낯설었다.

“집이 왜 이리 추워?”

엄마는 냉기가 도는 집안에서 두꺼운 옷을 껴입고 계셨다.

“보일러 올렸으니 곧 따뜻해질 거다. 오늘 여기서 자자. 네 핑계대고 아버지께 휴가 받았다.”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음에도 엄마의 모습은 왜소하고 적적해 보였다. 집안 곳곳에는 식구들이 북적이며 살았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데, 그 퇴색되어가는 흔적들 속에 엄마는 앉아 있었다. 그 흔적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날 밤 엄마와 나는 엄마의 방에서 잤다. 불을 끄고 나란히 눕고 난 뒤에도 엄마의 이야기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주로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이불 속을 따뜻하게 데우고, 슬며시 허공에 올라 어둠 속을 떠돌다가 벽이며 문틈이며 천장에 스며들었다. 엄마의 목소리 사이사이 바람이 창밖을 지나는 소리가 끼어들었고, 간간이 엄마의 긴 들숨소리와 잔기침처럼 토해지는 날숨소리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파고들었다. 그 적막한 틈새로 엄마는 이불을 들추고 살며시 빼낸 손으로 당신 뺨을 훔쳤다. 메마른 손으로 메마른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그 은미한 마찰음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엄마는 이제 낮이면 빈집으로 출근하듯 드나드셨다. 말씀이야 ‘집에 가서 잠깐씩 쉬었다 온다’고 하시지만, 청소하랴, 병원에서 가져온 빨래하랴 제대로 쉬실 수나 있을까? 그래도 집에 가야 쉬어진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 엄마에게 집은 ‘온전한 휴식처’ 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집은 엄마를, 엄마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그 집은 엄마에게 더이상은 감당하기 어려운 거추장스러운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엄마는 아버지가 계시는 병원 가까운 곳에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이사하기로 했다.

“엄마, 짐들은 어떻게 하지?”

“다 버리지 뭐.”

최소한의 짐들만 아파트로 실어 보냈다. 엄마와 나는 남겨진 짐들과 비워진 공간들이 엉켜 을씨년스러워진 집의 뜨락에 황망히 서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던 굵은 나무 둥치와 푸른 이파리가 풍성한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나무도 아깝다.”

“버려야지. 그게 뭐라고. 때가 되면 내 몸도 버려야 될 텐데….”


엄마와 나는 집을 떠났다. 아니, 집을 떠나보냈다.

여름이면 빨간 덩굴장미가 담장을 채우고 가을엔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튼실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가지를 담 밖까지 늘어뜨리던 집. 엄마가 정성스레 가꾼 뜨락에는 계절따라 꽃이 피었고 향기가 집안까지 스며들었다. 이제 그 집은 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 새롭고 생생하게 내 안에서 복원되어 가고 있다. 떠나보내기란 어쩌면, 더 깊은 ‘끌어안기’이고 ‘새롭게 만나기’니까.

얼마 전 방문했던 전동 성당, 경기전, 한옥마을. 내가 살던 곳 전주 전동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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