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개다가

by 고우니

개어야 할 옷가지들이 거실 바닥에 널려 있다. 아, 귀찮다. 누가 대신 해주면 좋겠다. 하긴 이걸 누가 대신해 주겠나. 결혼 전엔 내 옷 한번 변변히 개어본 일이 없었다. 남편 옷을 개며 비로소 결혼했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아이가 생긴 뒤부터 아이 옷을 갤 때마다 옷에서 나는 아이의 젖내음에 취해 얼굴에 빨래를 대보면서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체감했다. 그때의 그 두근거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어머니를 처음 뵈었을 때, 그 순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당뇨병을 앓은 지 수십 년이 지났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머님의 얼굴에는 어느 구석에도 그늘진 느낌이 없었다. 줄곧 시골 큰형님댁에 계시던 어머님이 우리 집에 머무른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두 번 다 당뇨 합병증 치료를 위해 전주의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퇴원하신 다음이었다.


우리 집에 처음 오셨을 때, 어머님은 나와 단둘이 있게 되자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아이고, 네가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해준 것도 없는데 병든 시에미 수발까지 하게 해 미안타, 느이 엄니한테 염치가 없네. 당장 집에 가고 싶다만 시골에 사는 너그 성들이나 작은 집에서, 동생네 가서 얼마 있도 못하고 온다고 할까 봐, 얼른 가도 못 허것다. 두 달만 있을 거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어라. 친정에다도 그리 말씀드리고.”


어머님은 뭐든 집안일을 거들어주고 싶어 했지만 불편하신 몸으로 거들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찾아낸 것이 빨래를 정리하고 개는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베란다를 드나들며 빨래가 말랐는지 만져보고 주름도 펴고 뒤집어 다시 널기도 하다가 고슬고슬하게 마르면 걷어들고 들어와 거실에 내려놓았다. 당신 아들 옷은 아들의 등을 토닥이듯, 손자 옷은 손자의 볼을 쓰다듬듯 한참씩 만지작거리며 주름도 펴고 먼지라도 묻어있는지 살피고는 잘 개켜 각 방 서랍에다 넣어 주셨다. 나는 옷을 꺼낼 때마다 반듯하게 정돈이 잘 되어있는 옷가지들을 보고 감탄했다.


두 번째 우리 집에 오셨을 때는 아들이 네 살 되던 해였다. 아들은 유별나게 낯가림이 심했다. 나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가려 하지 않았고 누가 안아보기라도 할라치면 심하게 몸부림을 치며 울어댔다. 할머니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님은 아이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보려고 했고 그때마다 아이는 질색하며 내 품으로만 파고들었다.


어머님은 아침 식사를 마치면 대부분 거실 소파에 앉아 지내셨다. 집안일을 하는 내게 이런저런 말씀도 하시고 내 옆에 붙어서 놀고 있는 손자를 바라보는 것이 낙이었다. 지그시 아이를 바라보다가 가끔 감탄한 듯 혼잣말을 하셨다.

“애비 꼭 닮았네. 어쩌면 뒤통수까지도 똑같을까. 가마도 똑같네.”


아들며느리 낯을 세워주느라 두 달을 머물기로 작정하셨지만 달포도 되기 전부터 보따리를 싸놓고 가실 날을 손꼽으셨다.

“갈 날이 이제 보름도 안 남았는데…, 쟤는 왜 사람을 붙여주질 않는다냐.”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급해지셨는지 곁을 내어주지 않는 손자에게 더 많이 야속해하고, 더 많이 서운해하셨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혼자 놀고 있는 손자를 바라보던 어머님이 슬그머니 다가가 “아이고, 내 새끼. 가기 전에 어디 한번 안아보자” 하면서 아이를 끌어안으려고 하셨다. 아이는 자지러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 ‘딸랑이’를 내동댕이쳤다. 딸랑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거실 끝 저만치 굴러갔다. 어머님은 놀라 얼른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내 옆으로 바짝 다가앉은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른 장난감을 들고 놀기 시작했다. 어머님은 화가 단단히 나셨던지 한참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이 난감한 상황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던 걸레질이나 마저 하려고 마룻바닥을 문질렀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어머님이 기어이 한마디를 툭 뱉으셨다.

“어휴, 우리 아들은 참 순했는데 얘는 아주 괴팍한 게, 성질은 널 닮았나 보다.”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괴팍한 게 날 닮았다고요? 당신 아들 닮아서 예쁘단 말씀이나 하시지 말든지. 걸레질하는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어머님의 말씀이 충격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온종일 저랑 둘이서만 지내서 그런가 봐요.”

그날 저녁 안방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아침에 있었던 그 일이 생각났다. 정말로 내 아들이 까칠한 걸까? 정말로 성질이 괴팍한 애로 자라면 어떻게 하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친구들은 자기 아이를 네 살부터 유치원에 보냈다며, 내게도 권했지만 아이가 생일이 늦어 고민 중이었다. 사람들하고 잘 어울릴 수 있게 하려면 유치원에 일찍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아이를 유치원에 등록했다. 집 가까이에 있는 유치원은 시설도 좋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남다르다고 소문난 곳이다. 게다가 아들이 들어갈 네 살 반은 정원이 대여섯 명밖에 되지 않고, 세 시간 남짓 보살피다가 셔틀버스로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한다. 그 정도라면 아이에게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나흘 뒤면 유치원 개학이다. 좀 이른 감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벌써 자라서 유치원을 보내게 되었다는 뿌듯함에 마음이 들떴다. 나는 아이에게 예쁜 새 옷도 사 입히고 기념사진도 찍으며 수선을 떨었다.

“어머니, 내일부터 아이 유치원 가요.”

순간 어머님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너, 참 모질고 독하다. 그 어린 것을 어떻게 떼어놓을 작정을 한다냐?”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아무리 시어머니라지만 며느리에게 괴팍하다는 것도 모자라 이제 모질고 독하다는 말까지…. 이렇게 막 해도 되나? 정말로 속이 상했다. 어머님이 반대한다고 이미 등록해 놓은 유치원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으로 갔다. 유치원에 도착하자 아이는 내 품에 딱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겨우 달래서 교실에 들여보내고 나는 교실 바깥에 서서 유리창 너머로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이는 친구들과 놀다가도 수시로 내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나를 찾기 위해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 조금 뜸해지고 놀이에 빠졌다 싶었을 때 나는 슬며시 유치원 문을 나섰다. 아이를 억지로 떼어놓고 오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유치원에 보내기로 한 일이 정말 잘한 일인지 걱정스러워 돌아오는 내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관문을 열고 미처 거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어머님은 아이가 유치원에 잘 갔는지, 잘 놀기는 하는지 등을 내게 물었다. 나는 잘 적응할 것 같다는 말로 얼버무리기만 할 뿐 어머님이 원하는 대답을 속 시원히 해드리지 못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정도 했을까. 아이는 더 이상 내게 매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교실로 들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걱정스럽게 아이가 어찌했는지를 묻곤 하시던 어머님께 나는 당당하게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아주 재미있어한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시는 모양이다.

“암, 내 그럴 줄 알았다. 갸가 얼마나 영리하냐.”

그럴 즈음에 어머님은 큰형님댁으로 가셨다. 이곳저곳의 체면과 형편을 고려해서 정했던, 딱 ‘두 달’을 채운 뒤였다.

“아가, 그동안 애썼다. 나 때미 힘들었지야? 돈도 더 들고 신경도 많이 쓰였을 건데, 고맙구나.”


어머님이 큰형님댁으로 가신 뒤, 빨래 개는 일은 다시 내 일이 되었다. 사실 어머님이 계실 땐 빨래를 개는 일이 내게 크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겨우 두 달 안 하다 다시 하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어머님이 큰형님댁으로 들어가시고 한참이 지나서도 나는 빨래를 갤 때마다 어머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뭐라도 도와주고 싶어 했던 어머님의 따뜻한 마음이 생각나서 애잔하고 그리웠다. 어머님은 병 때문에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은 탓인지 늘 발이 시리고 저리다고 하셨다. 나는 수시로 다리를 주물러 드리곤 했는데 내가 힘들까 봐 못내 불편해하셔서 사실 마음껏 주물러 드리지도 못했다.


세 번째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어머님은 다시 우리 집에 오지 못하셨다.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손자를 안아보려 했던 게 어머님으로서는 마지막 포옹인 셈이다.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시간을 절감하고, 사랑스러운 손자를 한 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어 했던 어머님의 간절한 심정을 나는 그때 알지 못했다. 어머님이 떠나신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빨래를 갤 때면 문득 어머님이 떠오르곤 한다.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죽은 사람 뒤치다꺼리 힘들게 시키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변 정리를 미리 다 하실 만큼 정갈하고 따뜻했다. 떠나신 뒤 어머님의 방에는 정말로 당장 입을 옷가지 몇 벌밖에 남긴 것이 없었다. 가슴이 쓰렸고 그 마음 씀씀이가 존경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님이 새록새록 그리워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 나를 서운하게 했던 말도 가끔씩 불쑥 떠오른다. 어머님에 대해 싫은 감정의 찌꺼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까칠하게 굴었던 손자 때문에 섭섭해했던 어머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정말로 괴팍한 성격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일종의 며느리 본능 같은 것으로 세상의 모든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상처 받은 일은 결코 잊지 않는 것일까. 내 친정엄마인 동시에 다른 이의 시어머니인 우리 엄마가 떠오른다. 시어머니에 비하면 엄마는 강한 편이다. 주관이 뚜렷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힘이 없다.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엄마는 딸인 나에게조차 사소한 부탁도 잘 하지 않아서, 오히려 힘이 들 때가 간혹 있다. 기껏 한집에 같이 산 시간이 두 달씩 두 번, 넉 달밖에 되지 않는 시어머니에 비하면 아마도 내가 엄마에게 상처받은 일이 더 많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인륜과 천륜의 차이가 그렇게도 큰 것인지 엄마에게는 섭섭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내게도 아들이 있는데 이를 어쩌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장차 시어머니가 될 터인데. 내 말실수 한마디를 수십 년이 지나 내가 세상을 떠난 뒤까지 며느리가 기억한다면 어떡하지? 이제야 덜컥 걱정되면서 내가 힘들까 봐 염려하고 손자가 붙여주지 않아 서운해하던 시어머니 생각에 새삼 가슴 더 아프고, 시어머니께 받았던 상처가 슬며시 아문다. 나는 참으로 이기적 인간이다.

빨래나 마저 개어야겠다.

어머니 추도식날 형님이 차려준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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