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발걸음을 한 옛 교회의 예배실에 들어갔다. 실내는 아침인데도 밝은 조명을 켜두어 더욱 환했다. 단상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소리를 가다듬고 있다. 예배시간에 부를 찬양 리허설을 하고 있나 보다. 찬양대석을 돌아보았다. 오랜 세월 교회에서 봐왔던 이정희 권사가 맨 뒷줄에 앉아 기도 중이다.
반가움에 얼른 옆으로 가서 인사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무도 못 뵐 거라고 생각해서 아쉬웠는데 이렇게나 이른 시간부터 와 계시네요.”
“항상 이 시간엔 와있어. 애란이 아버님이 애쓰고 일군 교회인데 내가 지켜야지. 반갑네. 근데 어쩐 일이야?”
예배가 끝나면 교회에서 점심을 마련해서 교인들이 함께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고 갈 수 있도록 했다. 나도 대부분 같이 식사를 했는데 그 준비를 위해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와서 수고하는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겨우 반찬 나르는 걸 돕거나 식사 후에 빈 그릇 옮겨다 놓는 것밖에 하지 않으면서 교회에서 밥을 먹는 것도 귀찮아할 때가 많았다.
“산소에 다녀오려고요.”
“그래, 그래.”
그는 그래, 그래 외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촉촉하던 그의 눈에서 기어이 한줄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나를 보고 아버지를 뵌 듯 반가워하시며 한동안 눈물을 거두지 못했다.
추석이 다음 주다. 나는 전날 전주에서 자고 일요일에 맞춰 교회에 다녀온 뒤 가족들과 함께 강진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전주에 살고 있을 때만 해도 11시 예배 한 번뿐이었는데 그새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2부로 나눠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9시에 시작하는 1부 예배를 마치고 갈 수 있게 되었다. 교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할 것 같아 아쉬웠다. 그런데 이 권사가가 그렇게나 일찍 와있었던 덕에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병원을 개업하시면서 전도사를 들여 병원에 온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전도하는 일을 하게 했다. 그런 다음 병원 건물 지하실에 기도실을 마련하고 원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기도나 묵상을 할 수 있게 했다. 장로였던 아버지는 다니던 교회를 나온 뒤 일요일에는 교회를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입원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을 위해 예배 인도를 했다. 기도실에는 단상이나 의자, 피아노 같은 일체의 물품들은 다 갖춰놓았다. 하지만 피아노 칠 사람이 없어서 피아노 반주가 없는 예배를 드렸다.
그 무렵, 나는 유치부부터 줄곧 다녀온 대형 교회의 대학부에서 아주 재밌게 생활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면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대학부와 대예배를 본 다음 오후에는 교사로서 초등부 예배에 참석하고 교사 토론이나 교사 예배까지 다 마친 후에야 집에 들어왔다. 부모님은 나에게 다니는 교회를 그만두고 병원 교회에 와서 피아노를 쳐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내가 다니는 교회로 가면서 늘 뒷머리가 굼실거리는 불편함을 견뎌야 했다. 아버지를 도와서 피아노도 치고 자리 하나라도 채워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다니던 교회에서 교사를 새로 배정할 때 병원 예배실로 가기로 결심하고 그 사실을 알렸다. 내 속을 전혀 모르는 대학부 선배에게 ‘일생 동안 자기를 키워주고 성장시켜서 이제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니까 슬그머니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하는 몰염치’라는 소리까지 감수해야 했다. 나는 아프게 결정을 한 것인데…. 말씀은 안 하셨다지만 차마 부모님을 거역하지 못했던 것뿐인데…. 키워주고 성장시켰으니 꼭 필요한 곳으로 가서 그동안 배운 것으로 봉사하라고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틀림없이 그 선배도 훗날 그땐 자기도 어렸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신앙생활은 그때까지가 전부였지 싶다.
작은 기도실로 시작했던 예배실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너무 비좁아져서 넓은 곳으로 이사 가야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때쯤엔 병원에 입원실을 없앴기에 굳이 예배실을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아버지와 함께 예배드리길 원했다. 어쩔 수 없이 병원 가까운 곳으로 예배실을 옮겼고 교회 간판이 달리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한 집 건너 한 집’이 교회인데 ‘한 집 건너 또 한 집’을 만들게 되었다고 걱정하시다가 얼마 후 전주에서 가까운 교외로 터를 정하셨다. 기왕 만들어진 교회라면 시내에서 떨어져서 교회에 다니고 싶어도 여의치 못한 사람들을 위해 그 사람들 가까이 가기로 하신 일이다. 저수지를 끼고 있는, 경치가 아주 좋은 조용한 마을에 자리 잡은 작은 교회는 그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엄마는 교회에 쉼터를 만들고 교인들 중 누구든지 나이가 들고 보살핌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쉼터에 와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하리라는 꿈을 갖고 계셨다.
하지만 교회의 성장과 달리 나의 신앙생활은 성장하지 못했다. 그저 그냥 습관인 듯 생활인 듯 벗어나지도 못하고 깊이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로 이어갔다. 아버지의 설교가 지루하거나 재미없지도 않았고 게다가 아버지의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번 열정이 지나간 뒤 사그라진 불씨는 되살려지지 않았다. 가끔 그때, 나를 그냥 그대로 뒀더라면 지금보다는 좀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생각될 때도 있다. 그땐 주일학교 선생에 율동 강사까지 하고 있어서 대표기도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처럼 남들 앞에서 책만 읽으라고 해도 긴장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싶고.
이제 교회가 세워진 지 삼십 년도 더 지났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병원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예배 인도를 하지 않으셨고 대부분의 교회 재정을 돌보던 엄마도 어느 때부터 더 이상 교회 일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는 새로운 장로를 세우고 목사도 맞이했다. 내가 서울로 이사 올 즈음 교회는 다시 전주 시내로 옮겨갔다. 그것은 사실, 교외에 교회를 세우셨던 아버지의 뜻과는 다른 일이었다. 게다가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까지 엄마의 손이 가지 않은 곳이 없는 교회를 옮기다니, 그다지 애정을 갖지도 않고 이방인처럼 왔다 갔다만 했는데도 내 마음이 다 쓰렸다. 부모님 마음은 어떨까 싶은데 두 분은 새 사람들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며 일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이제 엄마는 사람들이 신경 써주는 것이 불편해서 집 가까이에 있는 다른 교회를 다닐까도 했지만 지금껏 자리 지켜주고 있는 사람들 생각해서 그러지도 못한다고 하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나고 예배 장소가 몇 번 바뀌는 그 긴 세월 동안 이 권사는 아직도 교회 식구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가끔 아버지와 길을 가다가 아버지 덕에 생명을 건졌다고, 평생 아버지를 은인으로 생각한다는 사람들을 우연히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이 들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했던 교회사역에 대해서는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내 신앙생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많았으니까.
아버지 덕에 신앙을 알고 구원을 알게 되었다는 그의 눈물을 보면서 이제야 아버지가 정말로 귀한 일 하다 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이런 나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면서 세상 고생만으로도 녹록치 않았던 그가 수십 년 동안 먹인 교회 밥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되는 이런 나를, 나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시간 남짓의 예배가 끝났다.
“이제 언제 다시 보려나…. 오늘은 식사도 못하고 가네.”
이 권사의 눈에 또 한 번 눈물이 맺힌다.
“그러게요. 전주 오면 가급적 교회 오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의 손으로 만든 밥을 먹지 못하고 교회 문을 나섰다. 이제 새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서 내게는 낯설기까지 한 교회에서 아버지의 꿈을 굳게 지켜내고 있는 그의 눈물을 가슴에 품고 강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