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쌓기

by 고우니

대학 동창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다. 다들 바쁜 데다 사는 곳이 달라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기대된다.


모임 장소로 갔다. 먼저 와 있던 순이와 미진이가 반갑게 맞이해 준다. 깔끔한 실내 장식이 인상적이고 은은한 조명도 멋스러운 곳이었다. 커다란 창 아래로 넓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금희도 도착했다. 우리 넷은 만나자마자 그간 지냈던 일들을 나누느라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누군가의 위트에 같이 웃음 짓고 누군가의 걱정에 같이 한숨 쉬고.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면서 총무를 맡고 있던 미진이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목돈을 가지고 있는 게 부담스럽네. 일부를 나누는 게 어때? 다음부터는 애란이가 총무 맡아주면 좋겠고.”

“무슨 소리. 해외여행 가자고 열심히 모으더니. 총무는 여행 다녀와서 넘기기로 했잖아.”

“남편 혼자 두고 여러 날 집을 비우기 어렵네. 언제 여행 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 나눈 돈으로 남편이랑 애들이랑 가까운 휴양지에나 다녀올까 봐. 그 정도 나들이는 가능하거든.”


몇 달 전 미진이 남편은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꽤 오래 병원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지금은 거의 회복되어 일상생활은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남편 혼자 지낼 수 있는 형편은 아닌가 보다.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시기도 지나버렸나 싶다. 아이들 키우느라, 직장 생활하느라 사실 우리들끼리 변변한 여행을 한 적도 별로 없는데…. 이제야 모두들 자유로운 시간이 되었나 했는데….


문득 언젠가 친구 정이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몇 달이 지난 뒤 시어머니 친구 몇 분이 정이한테 조심스럽게 연락을 해 왔더란다. 시어머니가 총무를 맡고 있던 모임이 몇 개 있었던 모양인데 모임 돈을 시어머니가 미처 돌려주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나. 유품 정리도 다 끝나서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어머니에 관한 일이고 감당하지 못할 만큼 큰돈도 아니어서 기꺼이 내어드렸단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친구분들이나 돈을 내어드려야 하는 자기나 참 민망한 일이었다고.


“나이가 들면 모임에서 돈 모으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 어머님이 나름 분명하시고 남에게 폐 끼치고 사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빨리 떠날 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셨던 거지.”

정이의 말을 들으면서 막연하게, 나이가 들면 모임을 하더라도 돈을 모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나이’를 먼 훗날 어느 즈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때가 언제일지까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순이와 금희가 미진이의 말에 동의했다. 나도 별말 하지 못했다.

처음 모임 돈을 만들기 시작했던 때가 떠오른다. 우리는 학과가 정해진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내내 함께했다. 동아리도 다르고 각자 할 일들이 제각각이었지만 틈만 나면 넷이 붙어 다녔으니까. 그러다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얻는 등 생활이 달라지니까 예전처럼 자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그나마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더 줄었다. 더구나 사는 지역까지 달라졌으니.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돈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단다. 그러니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일단 물질을 모아놓자고.”

예전에 다니던 교회 목사님께 들었던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는 성경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가져다 붙인 내 말에 친구들이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그 후 우리는 우리들의 통장을 만들고 ‘마음’을 쌓기 시작했다. 어느 즈음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자라서 우리의 만남도 자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놀이공원을 다니는 등 꽤 오랫동안 여유를 즐기며 만났던 것 같다. 어디에 쓰겠다는 목적이 있었던 돈은 아니었지만, 그 돈이 우리에게 더 많은 마음을 쌓을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이제 결혼도 하고 각자 제 몫을 하는 사회인들이 되었으니, 우린 그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셈이다.

돈이 입금되었다. 왠지 쓸쓸해진다. 돈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아주 없애기는 아쉬웠던지 미진이는 얼마간의 돈을 남겨 놓았다. 조금 남겨둔 ‘마음’이 애틋하다. 이제 모임 돈이 부담스러운 나이가 된 걸 인정해야 하나 보다. 혹여나 쌓아 놓은 마음이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 두려운 나이가 된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나이에 따라, 인생의 단계에 따라 마음을 나누고 쌓는 방법 역시 달라져 가는 것이 아닐까 싶고. 그렇게 생각하니 쓸쓸함이 조금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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