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네의자에 앉아서

by 고우니

방에 앉아 있던 엄마한테 산책을 나가고 싶은지 여쭈었다. 흔쾌히 좋다고 하신다. 아파트 정문 가까이에 있는 그네의자로 갔다. 나무로 만든 그네의자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가볍게 그네를 흔들며 바람도 쐬고, 일어나 주변 구경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이 그네의자를 좋아하셔서 자주 나오곤 하는데,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를 보면 그냥 지나지 않고 한마디씩 건네시곤 한다. 엄마더러 부럽다고도 하고 나더러 대견하다고 하고…. 때로는 그만 가주었으면 좋겠다 싶을 만큼 붙들고 계속 말을 하셔서 난감할 때도 많다. 하지만 싫은 내색 하지 못하는 것은 이분들이 참 외롭구나 싶기도 하고, 점점 말이 없어지는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서다.


어제 만났던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가까이 오더니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말을 꺼냈다.

“몇 해 전 남편이 병으로 갔는데 난 병 수발 한 번 안 했어.”

“그럼 누가….”

“아들이 했지.”

“네? 아들이요?”

“난 오래전에 정 뗐거든. 돈도 다 날리고. 그 사연 말로 다 못해. 몇 해 동안 아버지 병 수발한다고 아들이 장가도 못 갔네. 이제 사십이 넘었어. 살아있을 때는 너무 미워서 아들 고생하는 것도 안 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도 불쌍하고 아들도 불쌍하고, 그러네.”

“...네.”

할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한참 있다가 가던 길을 가셨다.


오늘 첫 방문자는 연세가 아흔이 되신 할머니시다. 혼자 사시는 이 할머니는 하루 세 번 식사를 마치면 꼭 산책 나오신다. 걷지 않으면 다리에 힘이 빠져서 못 걷게 되는 거라면서 잠시 앉으시라고 자리를 내어드려도 서 있는 게 좋다고 사양하신다.

“저도 엄마 다리 힘 빠질까 봐 매일 이렇게 모시고 나오네요. 엄마는 내가 나가자 안 하면 꼼짝하질 않으셔요.”

“아이고. 정말 잘하는 거요.”

“딸이 가까이 있어서 좋으시겠소.”

엄마를 향해 할머니께서 말을 걸으셨지만 엄마는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나한테도 딸이 있는데 멀리 살아서 자주 못 봐. 그래도 매일 아침저녁 귀찮을 정도로 안부 전화를 해서 제발 하지 말라고 하네. 이렇게 잘 있는데 뭔 전화를 그렇게 해대는지 원.”

자주 못 보는 딸에 대한 아쉬움인지 살가운 딸을 가진 자랑인지, 한참 동안 전화를 너무 많이 해서 귀찮게 하는 딸 얘기로 열을 올리다 좀 더 걷고 들어가겠다고 총총히 가던 길을 가셨다.


잠시 후 우리가 ‘노래 할머니’라 부르는 82살 어르신이 오셨다. 노래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만날 때마다 노래를 부르신다. 오늘도 노래해 주십사 청했더니 기다렸다는 듯 뿜어져 나온다. 레퍼토리도 다양해서 웬만한 가곡과 유행가는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아파트 어르신들 모임에서도 노래를 곧잘 불러서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이라고 자랑이다. 사람들이 즐거워해주는 게 너무 좋단다. 얼마나 많이 불렀으면 그 많은 노래 가사를 지금껏 다 외우고 분위기 맞춰 선곡해서 부를 수 있을까. 노래로 행복할 수 있어서 사는 일이 조금은 더 즐거웠겠다. 엄마도 얼굴이 밝아지며 노래 할머니를 따라 콧노래를 부른다.

할머니가 노래하다 말고 멈칫하시더니 불쑥 이야기를 꺼낸다.


“아, 좀 전에 할아버지가 글쎄, 나더러 그 노래 잘하던 열아홉 아가씨가 어디로 가고 목소리까지 다 늙은 할머니가 되었냐고 하네. 자기 만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살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지나간 세월이 아쉽고, 자식을 다섯이나 키워내는 동안 가슴에 맺힌 아픔이 서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지네. 그래서 바람이나 쏘이자, 하고 나왔지.

아닌 게 아니라 젊음이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람이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버리고, 그나마 나는 이렇게 노래하고 다니는데 할아버지는 몸이 안 좋아서 주간보호센터에…."

미처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멈추는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할머니 등 뒤 낮은 언덕 위로 어느새 붉은 저녁노을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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