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받아두고 아직 읽지 못한 문예지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책을 펴고 목차를 둘러보는데 낯익은 이름이 있다. 깔끔한 외모에 선한 눈매가 인상적인 P선생이다. P선생을 처음 만난 건 어느 작가모임에서였지 싶다. 그땐 내가 구석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터라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P선생이 내 기억 속에 강하게 자리 잡은 건 두어 해 전 행사에서 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말할 때였다. 당시 신문사에 근무하던 그는 원래 사진작가였는데 살아남기 위해 글을 써야만 했다고 말했다. 천천히 약간은 더듬듯 쉬엄쉬엄 이어가는 그의 말투와 문득 말을 끊고 더 절실히 전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듯 손을 살짝 들어 올리는 제스처에서 무척이나 겸손하고 진솔한 느낌을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P선생의 글을 찾아 책을 폈다. ‘청소’라는 제목의 글이다. 회사에 다니다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일이 잘 안 된 것일까.
'맨손의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맨손으로 하는 일들 뿐이다. 일에 귀천이 없지만 삶의 관성은 그 일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대단히 고귀한 일을 하면서 살았던 것도 아닌데, 오십 년의 관성은 아직도 자신을 끔찍이 아끼고 있다.'
청소를 한다고 했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는 옷깃을 반듯이 세운 흰 와이셔츠가 유독 잘 어울렸다. 청소라니, 아무래도 그에겐 안 어울리는 일이다. 그 몸으로 고단한 노동을 견딜 수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내 눈은 그의 글을 따라갔다. 그는 낯선 집의 묵은 때를 걷어내는 일이 ‘묵은 나’를 걷어내는 일이며 멈추기 힘든 ‘관성’을 멈추게 하는 일이라 했다. 관성이라…, 쉬운 말로 하면 타성에 젖다, 매너리즘에 빠지다, 오랜 습관을 버리지 못하다,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정적인 어휘를 비껴가면서 물리적 법칙을 들어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변화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곤 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닥치지 않는 한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경우도 드물다.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관성, 그것은 더 질기게 우리의 삶에 달라붙는다. 관성은 그 무게가 무거울수록 커진다. 재산이나 지위처럼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인격이나 교양처럼 어떤 무형의 것일지라도 그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관성을 멈추게 하는 일’이란 그동안의 삶에서 궤도 이탈이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나이가 들어본 사람들은 다 안다. 몸과 마음의 관성을 낯설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온전히 바라보려는 그의 의지는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았다. 두렵다는 말을 썼지만, 그 두려움의 의미는 예사롭지 않았다.
'언젠가 관성이 완전히 소멸하고, 새로운 관성을 부여받은 새로운 나를 시작할 수 있을까. 낯선 집과 처음 하는 일이 두려웠던 것은 낯선 집이 아니라 낯선 나를 만나야 하고, 집이 아닌 나를 청소해야 했기 때문이다.'
P선생은 청소라는 외부적 활동을 통해서 자기 내부의 재조직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를 가늠하며,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오래전에 모임에서 만난 K는 전주의 큰 사업체 사장이었다. 어느 날 사업이 휘청거린다는 소문이 들릴 즈음 IMF 한파가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K가 모든 걸 접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직원들에게 조금이나마 피해가 덜 가도록 다 내주고 자신은 그야말로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어디로 떠났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는 말만 들려왔다. 사업이 망하겠다 싶으면 사장들이 미리 자기들 챙길 건 다 챙기고, 결국 사원들만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는 말이 흔하게 나돈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을 먹고 산다는 말도 있으니 그럴듯하다. 그런데 K는 그 반대였다. 안타까웠지만 몇 해가 지나면서 잊혀졌다.
서울로 이사하게 되어 이삿짐센터를 알아보다 K가 포장이사업체 사장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업을 접은 뒤 K부부는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다. 그런데 오십이 넘은 K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삿짐센터 일용 노동직으로 들어갔다. 둘 다 몸으로 하는 일은커녕 가사도우미를 두고 있어서 자기 집 청소도 별로 안 하고 살았을 터이다. 하지만 둘이서 열심히 일했고 몇 해가 지난 뒤 사장이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K에게 사업체를 넘겨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데, 여전히 고객들을 직접 챙기고 일도 직원들과 똑같이 한다고 했다.
K에게 이사를 맡겼다. 이사하기 전날 짐을 차에 모두 옮겨 실어두었다가 다음날 새벽에 서울로 출발한다고 했다. 미리 서울에 온 나는 형님 댁에서 자고 아침에 차가 도착할 무렵 집으로 갔다. 직원들이 각 방마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방엔 여자 직원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장식장에 유리그릇과 도자기들을 챙겨 넣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데 다른 방에서 있던 직원이 주방을 향해 그녀를 불렀다. “사모님~~” 뭐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대답하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 ‘사모님?’ 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여자 직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K의 부인이다.
“아, 서울까지 직접 오셨네요. 오랜만에 뵈어요.”
“많이 변했을 텐데 날 알아보네.”
아닌 게 아니라 작업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성장하고 화장도 잘 마친 상태로만 만나던 때와는 많이 달랐다. 예전과 다름없이 일을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일용직일 때와 똑같이 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장식장을 야무지게 정돈해 놓더니 냉장고를 정리하고 냉장고의 빈 서랍을 꺼내 구석구석 닦아내는 손길이 아주 능숙하고 꼼꼼했다. 대개는 꺼내온 것을 그대로 집어넣어 주는 정도로 일을 끝내는데, 저들이 재기에 성공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물건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드디어 이사가 마무리되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이사 잘 마쳤네요.”
나는 K의 부인을 태운 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에 만날 낯선 집은 어떤 모습일까.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까. 나는 내일 다시 낯선 별에 간다.
P선생의 글은 ‘내일 다시 낯선 별에 간다’로 끝을 맺었다. 잠깐 그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진 것은 나의 선입견일 수도 있다. 무거워서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 힘들겠지만 그냥 박수 쳐주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낯선 별’이란 낱말을 여러 번 음미했다. ‘낯선 별’과 ‘낯선 집’과 ‘낯선 자신’이 묘한 화음으로 변주되면서 정말로 나는 ‘낯선 별’을 여행하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삶에서 낯섦을 발견하는 어떤 순간, 당혹과 두려움과 궁금증이 증폭하고 또 감각과 의식이 생생하게 살아나며 예민해지는 그런 순간은 누구라도 한 번쯤 경험한다. 누구는 짧게 누구는 좀 더 길게, 또 어떤 경우엔 고통과 두려움으로, 어느 경우엔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마주치겠지만, 누구라도 낯섦의 순간을 피해 갈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순간을 깊이 응시하고 머무를 수 있다면 좀 다른 의미로 축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P선생이 지금 그런 것은 아닐까. 그의 글은 내게 슬픔보다는 어떤 신비한 빛처럼 어른거렸다. 그의 용기와 새로운 각오가 멋져 보이는 건 나의 낭만적 몽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삶의 깊이와 향기는 낯섦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익숙하다는 느낌 자체가 무지와 무딤의 징표일 수도 있다. 진실한 삶의 감각은 그 예민성에 있을 것이므로.
책을 덮고 거실 창문을 열었다. 연한 봄볕에 바람이 순하다. P선생 덕분에 나 또한 잠시 낯선 별을 향하여 한 발짝 나서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