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녘, 해운대의 해변을 산책했다.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모래는 윤기가 흐르고 발끝에 전달되는 촉감은 양털처럼 부드러웠다. 모래사장에는 모래로 쌓은 조각물들이 있었다. 모래성은 나름 웅장했고 모래로 만든 ‘사람’의 표정은 금방 모래를 털고 일어날 듯 생동감이 있었다. 한 작품에 아이들 두엇이 올라가서 놀고 있다. 그 옆에는 아이들의 엄마들이 무심하게, 아니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아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둘째 아이가 자라서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부터 아이가 돌아오는 시간까지는 온전히 내 시간이 되었다. 친구와 차를 마시며 아이가 커가면서 늘어갈 여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문득 친구가 함께 그림을 배워보자고 했다. 사실 그림은 나에게 뜬금없긴 했지만 그 친구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미술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 도구 챙기는 일이나 손에 물감 묻히는 것 등 아무래도 그림 그리는 건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흘려들었고 친구는 혼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대신 나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어렸을 때 꽤 오래 했었고 대학 때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느라 바빠져서 그만둘 때까지 쳤었던 터였다. ‘배운 도둑질’이더라고 피아노가 쉽게 선택된 거다. 그 후 십여 년이 지나도록 나는 피아노를 치고 그 친구는 그림을 그렸다. 그동안 친구는 미대에 편입해서 졸업하고 대학원도 마쳤다. 나도 나름 열심히 피아노를 쳤고 2년제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했지만 공부를 더 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마추어, 친구는 프로가 된 거다. 나는 어느 날 자연스럽게 피아노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친구는 열정이 시들지 않았고 초대전이니 개인전 등 창작 활동을 계속했다. 전시회 팸플릿을 더러 보내왔는데 그의 프로필은 점점 화려해지면서 어느덧 수상과 전시회 경력으로 한 면이 꽉 찼다.
내겐 그가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물로 준 그림 한 점이 있다. 고마운 마음에 지금껏 거실 제일 좋은 자리에 걸어두고 있다. 어설프지 않고 오히려 순수한 미감이 날이 갈수록 새롭다. 초기작이라 해서 내게 주는 감동이 적지 않은 건 쉬운 피아노곡이라고 해서 음악적 감동이 적은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서울로 이사 온 뒤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었지만 문득 이 친구의 그림이 눈에 들어오면 그림 속에 있는 꽃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로 피어난다.
친구는 몇 해 전부터 자기가 다녔던 대학 교육원의 강사가 되었다. 내가 대학에 강의를 다닐 때 이 친구가 나더러 교수 친구 둬서 좋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반대로 이 친구가 ‘교수 친구’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중견작가가 되어 사람들이 돈을 내고 친구의 그림을 산다.
그런데 전시회가 끝나고 그림이 팔렸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기분이 묘해졌다. 괜히 친구의 그림이 아까워져서다. 그렇다고 전시회를 했는데 한 장도 팔지 못했다면 그도 이상할 것 같고. 사실 처음에는 전시회에 가서 사람들이 그림을 산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림 팔리면 기분이 어때? 그렇게 애쓰고 그린 그림을 팔려면 아깝지 않아?”
“팔리긴 해야지. 그런데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 그림 하나하나가 자식 같다니까. 그림이 팔리면 내 자식 파는 것 같이 속이 쓰려. 가서 사랑받지 못할까 봐 애태워지고, 근데 또 안 팔리면 내 자식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아.”
“그러게, 그 마음 아픈 일을 왜 계속하냐고?”
“남 말하기는. 그림은 어딘가에 남기라도 하지. 피아노 치는 건 그 순간 사라지잖아.”
맞는 말이다. CD 틀어놓은 줄 알았다던 내 피아노 솜씨는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까.
친구 말처럼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어딘가에 남기라도 하지. 금방 사라지고 말 모래 위에 애써 조각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자식 같은 작품을 모래 위에 올리고 그것이 스러지는 모습을 매번 봐야 하는 작가라니.
모래성 위에서 노는 아이들은 밤 깊은 줄 모르고 놀고 있다. 아이들이 작품에 올라가도록 내버려 둔 걸 보면, 설마 전시 기간에 아무나 올라가서 놀게 놔둘 리는 없고 축제가 끝났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도 묘하게 기분이 씁쓸하다. 결국 없어지고 말 운명이라지만 일부러 망가트리기까지 하다니. 아이 엄마들의 몰상식을 탓했다. 그러다 문득, 모래 작가는 전시를 마친 작품에 올라가 놀 아이들의 행복까지 선물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들이 작품을 완성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람에 날리고 파도에 밀려 사라질 때까지, 작품은 계속 새로운 완성을 거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손에서 떠난 작품이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 모습에 더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을까. 친구가 그림이 팔리면 자식 떠나보내듯 아프면서도 또 그림을 보고 좋아해 주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더 큰 보람을 느끼고 기쁘다고 했듯이.
하긴, 조금 이르거나 조금 늦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필경 소멸되고 만다. 어차피 영원한 것이란 없다. 그러니 저 빠른 소멸을 내가 연연할 일은 아니지 싶다. 곧 사라지고 말 모래성을 쌓고 또 쌓으며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인 바에야.
(2018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