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분의 행복을 찾아서
"무슨 일 하세요?" 첫 만남의 어색함을 깨는 이 단골 질문은 때로 날카로운 송곳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람들은 나의 취향이나 성격, 소중한 관계보다 내가 무엇으로 먹고사는지를 훨씬 더 궁금해하는 듯하다.
마치 자기소개가 곧 명함이라는 듯, 나 역시 한때는 그 작은 종이 쪼가리가 나를 증명한다고 믿었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비영리단체에서 시작되었다.
대외활동에서 두각을 보였던 덕에 별다른 구직 활동 없이 돈을 벌기 시작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독특하다 못해 기이했던 조직 문화와 일하는 방식에 숨이 막혀왔고, 결국 얼마 못 가 이직을 결심했다.
두 번째 회사는 철저한 이익 집단이었다.
법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이력을 살려 인사팀에 지원했고, 계약직이었지만 당시 회사는 노동조합 설립과 개발직 공채 시작이라는 격변기를 맞고 있었다.
덕분에 하루하루가 배움의 연속이었고,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아 성취감을 느꼈다.
정규직 전환의 기회가 눈앞에 있었지만, 갑자기 온 ‘굴러온 돌’에 의해 무산되었다.
함께 했던 팀원들은 숨길 수 없는 아쉬움과 미안함을 담아 송별회와는 별개로 마지막 퇴근길, 회사 밖까지 배웅하며 손편지와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 따뜻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혼 전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에 쉼 없이 세 번째 회사로 향했다.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소속사였다.
그러나 이직 첫날부터 옆자리 대리의 노골적인 적대감을 감지했다. 그 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타 팀 사람들마저 알 정도였다.
하루는 용기를 내 물었다. "대리님, 저는 대리님과 좋은 동료로 잘 지내고 싶은데, 혹시 제가 실수한 것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음… 귀염성이 없달까?"
사람 싫어하는 데 이유 없다지만, 회사에서 ‘귀염성’이라는 단어를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람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곳에서 평판 좋고 일 잘하는 인사담당자로 계속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 ‘명함’ 하나 잃는 것이 두려워 나는 버텼다. 버티는 동안 기존 팀장은 내 신혼여행 기간에 다른 회사로 떠나버렸고, 새로 온 팀장은 자기 사람을 데려와 노골적으로 나를 찍어 누르는 정치질을 일삼았다.
매일 아침 출근길, 포스코 사거리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보다 더 괴로운 것은, 온통 나를 괴롭히는 그 대리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삶의 주인 자리에 그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온종일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 끔찍한 현실을 깨달은 순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퇴사 후 친구와 공부방을 창업해 보기도 했고, 좋은 목소리라는 장점을 살려 아이들 독서토론 수업도 진행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탓일까, 내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NO Jumping!"이었다.
만 3세부터 60년대 생까지, 다양한 직업과 역할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본 결과, 나는 어쩌면 사람과 직접 부딪히며 일하는 것과는 맞지 않는 체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지금, 나는 강아지 산책 전문가로 일한다. 좋은 고객들을 만나 수입도 꽤 쏠쏠하다.
하지만 문득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대학까지 나왔나’ 하는 현타와 함께,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에 내밀 그럴싸한 명함이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명함이 있든 없든, 나는 내 삶에서 1인분의 몫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는 것을.
소명이나 사명이라 부르기엔 거창할지 몰라도, 매일 주어진 작은 일상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 나에게 맡겨진 소중한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제 나는 알람 없이 일어나고 싶을 때 눈을 뜨고, 테라스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와 함께 여유로운 저녁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누군가에게는 명함 없는 내 삶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나는 내가 선택한 이 삶 속에서 온전한 1인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