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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속 Aug 30. 2024

6. 처음 마주한 나의 슬픈 신

너의 탓이 아니야

 내가 너에게 말해 주었던 그 작은 신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면 아이] 라고 불려. 이름은 상관없어. 그저 그것의 존재를 알아 주는 것이 중요해. 나는 침대에 누워 [내면 아이 명상] 이라는 제목의 영상을 틀었지. 무기력한 내 마음의 근원을 찾는 과정이었어.


 너의 가장 첫 기억은 뭐야? 현재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려면 그 감정과 연결된 첫 기억을 찾아야 해. 현재 무기력하다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무기력하다고 느꼈을 땐 언제였는지, 외롭다고 느낀다면 버림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을 가장 처음 느꼈을 땐 언제였는지.


 나의 무기력과 불안함의 첫 기억은 엄마와 아빠가 집 안에 물건을 이리 저리 던지고 깨뜨리며 싸우는 상황이었어. 나는 주저앉아 울면서 그들을 지켜봤지. 원룸에 살았기 때문에 숨을 곳이 없었어. 그냥 그대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어. 첫 기억을 떠올리라는 말에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렸어. 그들을 말리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4살 짜리 아이의 무능감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어. 가슴을 치며 펑펑 울었던 것 같아. 그때 기억이 슬펐던 것도 있지만 여전히 그 아이가 작은 원룸에 앉아서 엄마, 아빠를 올려다 보며 그렇게 울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기에 더 슬펐던 것 같아. 가여웠어.


 선생님이 물었어.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을 들어 볼까요?"


 이런 명상이 처음이라 조금 어려우면서도 진짜 이 아이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아이에게 마음 속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기다렸어. 그리고 잠시 후에 아이가 울먹이면서 말했어.


 "아빠랑 엄마랑 싸우지 못 하게 말리고 싶은데, 그러다가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무서워. 나를 버릴까봐 두려워."


 2021년의 내가 1991년도의 나를 처음 그렇게 대면한 거야.


 나의 슬픈 인생을 창조하고 있던 그 정체는 괴물도 악마도 아닌 작고 여린 4살짜리 꼬마 아이였던 거야. 잊혀진 채 아무도 달래준 적이 없는 참으로 슬픈 신이지.


 "그 아이가 그때 무슨 말을 듣고 싶었을까요? 그 말을 그 아이에게 해주세요"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어. 지금 이 순간 이 말을 내가 꼭 아가에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니까.


 "너의 탓이 아니야. 너는 너무 어렸잖아. 무서운 게 당연한 거야."


 그렇게 아이에게 말해주니까 눈물이 나면서도 무언가 안심이 되고 따뜻한 감정이 들었어. 아이도 조금 진정이 되는 듯 했고. 이 모든 게 나의 상상이든 아니면 정말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실재하는 상황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그 아이에게 내가 그렇게 말을 해줌으로써 그 공간 안에 치유의 에너지가 생겼다는 게 중요한 거야.


 영상 속 선생님은 이어서 말하셨어.


  "그 아이를 꼭 끌어 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자다가 새벽에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에 깬 아이는 추운 겨울이라고 엄마가 바닥에 깔아 두었던 두꺼운 이불 위에 앉아 있었지. 그들은 싸우느라 아이가 우는 거에는 관심이 없었어. 나는 그런 아이에게 다가갔고 차가운 몸을 꼭 안아줬어.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해.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해.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아. 항상 내가 너의 곁에 있을 거야."


 그거 알아? 세상 모든 존재는 자신이 온전히 수용되길 바라. 그래서 갈등이 생기지. 내 마음을 몰라주는 친구, 애인, 가족 등 하다 못해 서비스 센터 직원과도 갈등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으니까. 표면상으로는 "네가 나를 짜증나게 하잖아." 라고 말할지라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나 지금 불안해, 힘들어, 나를 사랑해줘, 나를 버리지마." 하고 그 사람의 어린 신이 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 마음, 감정도 똑같이 수용되기를 원해. 이것들은 살아있는 존재들이야. 그래서 그들을 잘 느껴주고 사랑해주면 다시 근원인 빛으로 돌아가지. 그렇지만 대면하기 싫어서 외면하면 그것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자신을 닮은 세상을 창조해. 그래야 네가 그 슬픈 신을 찾아가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런 칭얼칭얼 대고 달래줘야 하는 존재에게 왜 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처음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내면 아이]를 [내 안의 어린 신] 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야. 세상에 어둠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둠이 어둠인지 모를 거야. 세상에 오직 사랑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절대 그것이 사랑인지 모를 거야. 우리 안의 작은 신은 자신이 스스로 어둠이 되어 우리에게 그들을 온전히 수용하고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그 자리에서 큰 빛이 되어 오히려 우리를 밝게 빛나게 하는 그런 아주 아름답고 숭고한 존재야.


 나는 그렇게 처음 엄청난 치유의 에너지를 느끼게 되고 거의 매일매일 내 안의 어린 신을 찾아 정화 작업을 시작했어.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다독여주고 사랑해주면서. 근데 말이지. 이상하게 현실은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 정신적으로, 재정적으로 점점 힘들어졌어. 왜 그랬을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화 과정에서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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