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다를 연모한 가시나무(1)

공주의 집착

by 은송하

"이렇게 누추한 곳에 공주 자가가 오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설향은 주황빛 저고리에 모란이 곱게 수 놓인 쪽빛 치마를 입었다. 머리에는 청나라에서 들여온 꽃 모양 비녀 두 개를 나란히 꽂고 있었다. 객주의 위엄은 갖추되 오시는 손님들 보다는 정갈하게 가꾸었다.


“내 다과회에 오신 숙원과 궁에 온 정경부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소. 이곳의 요거타 라는 것이 어여쁘기도 하고 한 입 덜어 입안에 넣으면 눈 녹듯 녹으면서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공주는 햇볕을 거의 못 쬔 사람처럼 얼굴이 허여멀건하고 눈이 퀭해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팠다. 자신을 아끼던 오라비이자 세자인 휘랑이 자살하자 큰 상심에 빠져 심약해지기 시작했고, 대제학댁 아들과의 혼사가 깨지면서 병세가 더욱 악화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똑똑.


“들이거라.”


지우가 작은 소반을 들고 들어와 공주 앞에 놓자 공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음식들을 둘러보았다. 지우는 공주를 힐끔 보고는 뒷걸음질하며 조용히 방을 나갔다.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었음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군요. ”


공주 앞에 놓인 상 위에는 요거타가 있었다. 걸죽한 이화주 위에 잘 말린 호박씨와 곶감, 매실장아찌가 소복이 올려져 있고 그 옆에는 나물과 홍달홍달, 육전이 놓여 있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저 평범한 막걸리일 뿐인데 다들 과찬이시니 장사치로서 고마울 뿐이지요. 손님들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고 싶은 진심이 통했으니. 오늘 상에 올린 것은 초하루에 담은 뒤에 처음 상에 올리는 것입니다.”


공주는 설향의 설명을 듣고도 대꾸하지 않은 채 맞은 편 자리의 방석만 다정하게 바라봤다. 설향은 공주의 침묵이 말하는 바를 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바깥으로 향하는 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말라 일러두었습니다. 기다리시는 분이 편하게 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고맙네.”

설향의 음성과 반지를 끼지 않은 손이 공주는 마음에 들었다. 제 주제를 알고 튀지 않으려 애쓰니 말이다.


충의원에 있는 고급 자개장은 겉으로 보기엔 여닫이문이 달린 이불장 같았지만, 안쪽은 밖에서 쓰지 않는 커다란 아궁이와 연결되어 있었다. 지우는 그 안에서 바깥 상황을 기록해 설향에게 전해주곤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하는지 설향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 도현에게도 설향이 시키는 잡일을 돕는 것뿐이라며, 무언가를 들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한 건에 한 냥이라는 돈 안에는 침묵도 포함이었다. 자개장 안으로 들어온 지우는 이마의 흙을 털어내고, 바닥에 붙은 작은 받침대 위에 종이를 올린 뒤 얇은 붓을 집어 들었다. 종지에 담긴 식초에 붓끝을 적시고,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난 모양인지 치맛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들리었다. 공주가 배웅을 나갈 정도면 들어오는 이가 평범한 이는 아닌 듯했다.


‘왕족인가? ...남자? 공주가 밀회라도 즐기는 거면 이거 한 냥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겠어. 나중에 쪽쪽거리면 좀 곤란한데. 흐흐.’


걸음이 진중하고 무거운 것이 꽤 건장한 사내일 것 같았다.


“유진 오라버니!”


공주의 목소리에 설레임과 떨림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정인을 만난 듯한 상기된 얼굴과 수줍은 손짓이 풍겨내는 달콤한 내음이 남자에게 가 닿았다. 남자는 그 내음이 달갑지 않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주 자가.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유진? 좌승지 영감을 말하는 건가? 이런...사내는 아무 감정도 없잖아! 불쌍한 공주 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내이길래 공주 자가를 밀어내는 것이야?’


공주가 한 걸음 내딛자 방으로 들어온 대제학 신준성의 아들 좌승지 유진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유진은 무인으로도 실력이 출중해 떡 벌어진 어깨에 귀골이 장대하고 큰 눈에 눈꼬리가 길며 눈빛이 매서웠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압도할 기세였다. 그러나 부드러운 코 망울에 여인의 입술이라 해도 될 만큼 붉고 선이 분명한 입술, 심금을 울리는 그의 진정성 있는 목소리는 한양 안 어느 명문 세가의 아가씨라 해도 마음이 설레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하였다.


"앉으시지요.”


공주는 제 마음이 더 큰 것을 오늘도 확인해서인지 말에 섭섭함이 배어 나왔다.


“궁에만 있기 답답하던 차에 이곳의 소문을 듣고 바람도 쐴 겸 나와보았습니다. 오라버니와 마주 앉았던 시간도 언제였던지 까마득합니다.”


“아직 밤에는 바람이 찹니다. 옥체가 상하시면 전하께서 걱정하실 겁니다.”


유진은 공주의 맞은편에 앉아 상을 쳐다보았다. 이것들이 주안상인지 다과상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병약한 제가 하루 빨리 죽기만을 바라실 겁니다. 제가 큰 오라버니 일을 끄집어내는 것을 마뜩잖아하시니 말입니다. 어제도 다시 조사해달라고 영상을 통해 상소를 올렸던 참입니다.”


“그러셨군요.”


“휘랑 오라버니는 왕으로서 위엄이 부족하셨을진 몰라도 세상을 인애하셨습니다. 등질 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다 확인하신 일을 공주 자가께서 계속 들춰내시면 불충으로 여겨질 겁니다. 아무리 영상이 상소를 올렸다 하더라도 공주 자가의 손을 거친 것임을 모를 분이 아니십니다.”


“전하께서는 세자셨던 큰 오라버니가 하는 일이라면 다 싫어하셨습니다.”


“...”


“동물을 키우는 것 하며. 사냥보다는 약초 캐는 것을 더 좋아하신 거 하며. 전하께서 오라버니에게 제왕의 도에 대해 몰아세우지만 않으셨어도 큰 오라버니는 그런 결정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그런 겁니다.”


유진은 잠시 자개장에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은우를 바라봤다. 선을 넘지 말아 달라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고 생각했지만, 은우는 격앙된 채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쏟아냈다.


“모르죠. 전하께서는 오라버니가 그러하신 것처럼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은우야!”


평소라면 자신의 말을 끊은 상대를 그냥 두지 않았을 공주였지만, 유진 앞에서는 말이 많았음을 깨닫고 금세 후회했다. 유진이 싫어하는 이야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싫어하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본성으로 지껄여댔다.


“죄송해요. 큰 오라버니는 저를 많이 아끼셨으니 아직 너무 그리워 그럽니다.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어 그럽니다. 저기 오라버니. ...이거 드셔 보셨어요?”


공주는 유진의 눈치를 살피며 놋그릇에 예쁘게 담긴 요거타를 유진 앞으로 슬그머니 밀었다.


유진은 어서 이 자리를 떠났으면 하는 속내를 감추려 눈을 천천히 껌뻑이고는 숨을 찬찬히 내쉬었다.


“아니요. 여기 보이는 두 가지는 처음 보는 음식입니다.”


“여기 효원각에만 있는 음식이어요. 요거타와 홍달홍달이라고. 요거타는 이화주에 과실이나 채소를 올린 것이고 홍달홍달은 서양 홍시에 달걀을 푼 요리라고 하여요. 이름이 귀엽지 않아요?”


“그렇군요.”


유진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궁과 본가만 오고 가니 이런 여각의 음식은 오랜만이었다. 유진과 은우는 말없이 음식에 몇 젓가락 댔다.


“저기 오라버니.”


공주는 유일하게 유진의 눈치만 보았다. 그것이 자존심 상하면서도 제 마음을 저도 어쩌지를 못하고 유진을 붙잡고 있었다. 유진과의 혼약이 분명하게 파투난 것은 3년 전 동지쯤이었다. 세자가 자살하고 선왕이 죽으면서 궁에서 줄초상이 이어지자 혼례는 미뤄졌다.


은우의 본성에 질려버린 유진이 은우에게서 완전히 마음이 떠나면서, 때마침 유진의 친모가 지병으로 죽으면서 유진과 은우의 관계는 완전히 끝나버렸다.


유진은 3년 상을 치르고 효를 다한 뒤에 혼인할 것이니 귀하신 공주 자가를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고 파혼을 요청했었다. 유진을 아끼는 지금의 왕은 유진의 파혼을 단번에 허락했다. 공주는 둘째 오라버니, 왕이 더욱 미워졌다.


왕은 갈수록 미운 짓을 하였다. 이제 3년 상이 끝나고 궁에 다시 들어온 유진에게 다가갈 절호의 기회에 왕은 재를 뿌렸다. 유진이 평양 부윤의 딸과 정혼하도록 밀어주고 자신의 부마 간택이라니.


“인상 좀 펴셔요. 밖에서는 오라버니라고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편하신 데로 부르셔도 좋지만 이제 부마 간택으로 금혼령이 시행될 것인데 저를 그렇게 살갑게 부르시면 공주 자가에게 폐를 끼치게 될까 염려됩니다.”


지우는 자개장 안에 켜놓은 작은 호롱불에 의지하여 간략하게 써 내려갔다.


「공주가 부마 간택을 앞두고 좌승지 신유진을 만남. 공주가 미련을 못 버림. 곧 금혼령이 시행될 예정. 좌승지 영감은 평양 부윤댁과 정혼.」


“저에게 끼치는 폐는 저에 대한 마음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저를 은혜 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 간택에 간택 단자를.”


유진에게는 잊고 싶은 옛일이었다. 유진이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처음 궁에 들어가 만난 공주는 선녀와 같았다. 솜털이 보송한 공주의 피부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유진의 눈에 닿은 뒤로 며칠 동안 잊히지 않아 괴로웠었다. 은혜한다고 했었다.


공주가 유진 앞에서와 다르게 거칠게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잔인하게 내치는 걸 알게 되기 전까지 말이다. 어린 시절 호기롭게 보인 마음 한 조각을 후회하면서 학문과 일에만 매진한 지 오래였고 잘 마무리했다고 여긴 공주와의 관계는 계속된 공주의 물음에 제자리걸음이 되기 일쑤였다.


공주는 예전처럼 유진이 스스로 부마의 길을 선택했으면 했다. 오늘도 그것을 말하려 ‘마지막’이라는 단서를 붙여 불러냈다. 공주라는 운명 앞에 순응하면서 유일하게 욕심을 낸 것이라 여겼다. 유진의 마음 어디엔가 자신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긁고 또 긁었다. 유진의 마음에 남은 아름다운 추억마저 찢겨 나가는 줄을 모르고서 말이다.


“...마지막이라 하여 여기까지 와주신 것 압니다. 부마 간택에 응해주십시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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