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다를 연모한 가시나무(2)

그리움의 부작용

by 은송하

“전하께서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공주 자가에게 많이 부족합니다. 영의정댁 손녀가 저와 혼약을 맺은 뒤에 죽었으니 부정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부윤댁과의 혼약을 깰 수는 없습니다.”


공주는 다시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다.


“미...친 왕. 누이의 소원이라는 데 귓등으로 듣더군요.”


유진은 허리를 굽혀 바짝 조아렸다.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이제는 은우라고 이름을 부를 감정조차 남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기개와 신념은 어디 갔단 말이오. 내가 은혜 하던 그 모습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전하께서는 만백성의 아비로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제 기개와 신념은 남녀 간의 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왕이면 뭐하오. 내게는 끔찍한 오라비일 뿐인 것을. 좌승지 영감이 부마가 되고 싶더라도 오라버니가 반대하든 대제학 대감께서 반대하시겠지요? 집안에 하나뿐인 아들이니. 전하의 하나뿐인 친구이니.”


공주는 유진과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그의 마음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어 눈을 꼭 감은 채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다. 주상과 대제학을 들먹거렸다. 유진의 마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 때문이라고 원망하고 싶었다. 입술을 떨며 요거타를 한 숟갈 떠먹었다.


“쓰디쓴 마음과는 다르게 맛있네요. 곶감이 달콤한가 하면 호박씨가 고소하고, 그리고 끝에 올라오는 술맛이 일품이고.”


“공주 자가. 할 말이 있습니다.”


공주는 유진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되었다. 각오했었는데도 보고 싶었고 다짐을 했었는데도 또 마음을 밀어붙였다.


“이거 다 먹고요. 이거까지만 먹는 거 정도는 저에게 해줄 수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 사이에.”


바깥의 숨 막히는 정적에 지우는 숨이 막힐 거 같았다. 제 심장이 들썩이는 달달한 대화도 기가 막힌 정보도 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 아까웠다.


‘공주님. 사내의 이야기를 어서 듣고 마음을 깨끗이 접으십시오. 공주님 좋다는 사내들이 한양 도성에 줄을 설 것인데.’


수저가 놋그릇에 부딪히는 딸깍 소리만이 나기를 여러 번.

술이 사내의 목젖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한 번.

풀썩!


‘뭐지?’


잠시 졸던 지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오라버니. 나도 어쩔 수 없이 이 왕조의 피가 흐르나 봅니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죽이거나 죽던가 하지말입니다. 어차피 죽을 몸. 전하께서 문책하시면 사약을 받으면 그뿐입니다. 우리 저승에서 만납시다.”


공주는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여느 야담을 보지 않아도 알 거 같습니다. 이곳에 나도 내 입을 맞추고 싶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오라버니의 입술에 입을 맞추는 무례는 하지 않겠습니다. 내 마지막 친절입니다. 메마른 가시나무 같은 절 매번 밀어내는 바다 같은 오라버니는 언제나 저의 꿈이었습니다.”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며 방을 나서는 소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우는 자개장에서 뛰쳐나왔다.


“아니... 아니. 이런 젠장. 내 작품에 손을 대서 사람을 죽게 해? 이거 어쩌지? 객주가 알면 타락산 깊은 곳에 파묻거나 청계천에 던질 텐데.”


얼마 전 칠복 어멈이 새로 들어온 기녀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만약에 술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다 사람이 쓰러지면 말이야 빨리 객주님께 말해야 할 거야. 얼른 치워서 여기서 죽었다는 소문이 안 나게 해야 하니 말이야.’


지우는 유진의 상체를 들어 입을 벌린 다음 물병의 물을 유진의 입에 억지로 콸콸 쏟았다. 그런 뒤에 일으켜 세워 뒤에서 끌어안은 뒤 배를 세게 압박했다.


“이보시오. 좌승지 영감! 먹은 걸 토해야 이 밤에 살 것이오. 힘을 내시요!”


지우는 온 힘을 다해 다시 유진을 끌어안으며 배를 눌렀다.

우웩.

좀 전에 마신 술과 함께 얼마 먹지 않은 음식까지 다 토해내었다.


“일단 밖으로 옮겨야 할 거 같은데. 좌승지 영감. 내가 작년 단오 때 남촌 씨름대회에서 100근 이하 사내들 대결에서 3등을 했소. 나를 만난 걸 행운이라 여기시오. 그때 가슴 가리개를 세 개나 칭칭 감고. 하여튼 고생했는데. . . .강지우! 혼자 중얼거릴 때야? 쓰러진 사람 앞에서도 자랑질이냐고. 어서 좌승지를 옮길 생각을 해야지.”


지우는 밖으로 나가 사다리를 가져왔다.

지붕에 달린 고드름을 딴다고 겨울에 쓰고 그대로 놔둔 것이었다.


“게으른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구먼. 객주님께 잔소리를 듣고도 계속 놔뒀으니 말이야.”


끙차하고 유진을 밀어 사다리에 올리고 마루와 댓돌 아래로 가서 사다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당겼다를 반복하며 유진을 겨우 수레에 태우고 거적때기를 위에 덮었다.


“내 모른 척하여도 되지만 좌승지의 아버님이 우리 아버지와 벗이니 내가 특별히 살려주는 거요. 얻어먹은 쌀보리가 상당하니 말이오.”


지우는 힘겹게 수레를 끌어 북촌의 어느 기와집 앞에 멈추었다.


“여기는 북촌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


지우는 집 앞에 잠시 멈추어 상념에 잡혀 있다가 결심이 선 듯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 들어서자 마당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거친 봄바람에 작은 소쿠리 하나가 제 몸을 뒤집어가며 지우 곁으로 다가왔다. 그게 뭐라고... 지우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끝명이가 호박씨 담아 먹던 소쿠리네. 다친다고 했는데도 대나무 살 하나 삐져나온 저 소쿠리만 쓰다가 결국 긁히고.”


귀신이나 도깨비가 들어앉아 있어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어두운 집 마루에 분홍빛 꽃잎이 을씨년스럽게 나부끼고 있었다.


“역시. 세자 정도 자살하니까 아무도 안 사고 아주 평화롭구먼. 조금만 기다려. 오라버니 빚 다 갚고 널 데리러 올 테니까.”


지우는 집을 한 바퀴 쭉 둘러보더니 마당을 가로질러 안방을 향해 수레를 밀었다.


5년 전, 세자가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스승이었던 지우의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가 맛있는 저녁도 먹고 백단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다음 날 아침 그는 목을 매 숨졌다.


지우 일가는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지우네 집에서 일하던 끝명은 고초를 당해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우는 충의원에서 공주의 편을 들고 싶었다. 세자와 그의 동생이었던 지금의 주상과는 어릴 적 이 마당에서 잠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죽은 오라비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통탄을 듣자니 괜히 자신의 탓인 것처럼 미안해졌다.


끝내 공주에게 마음을 내어주지 못한 사내는 공주의 올무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공주님. 이 사내를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지요? 지금 후회하고 계시지요? 살리는 것이 당연한 사람의 도리이기도 하지만 공주님께 빚진 마음을 조금 갚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지우는 방으로 유진을 옮기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자기보다 한 자나 더 큰 사내를 옮겼으니 거칠어진 숨이 쉬이 가라앉지를 앉았다. 곡물들을 보관했던 용기 하나하나를 다 열어보았으나 남은 곡식이 아무것도 없었다.


“녹두가 있어야 하는데. 효원각까지 다시 가야 하나?”


아버지께 들은 적이 있다. 비상 먹고 죽으려고 하는 자가 있을 때는 녹두 갠 물을 가지고 가는 게 좋다고 말이다. 공주가 먹인 것이 비상이 아닐까 해서 찾는 것이었다.


“엄마... 녹두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때 바람이 불며 부엌문이 덜컹거렸다.


“엄마야!”


지우는 놀라 다리를 헛디뎠고 낡은 선반에서 후두둑 그릇들이 쏟아져 내렸다.


“으악~~~!”


넘어진 채로 바닥에 쨍그랑거리는 그릇들을 보았다. 달빛에 가까스로 보인 것은 껍질이 그대로 있는 녹두였다.


“좌승지 영감~. 다행히 오늘은 죽을 날이 아닌가 보오.”


지우는 씩 웃으며 녹두를 주워 모아 곱게 갈았다. 물에 갠 뒤에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의 머리를 제 다리 위에 올리고 입을 억지로 벌렸다. 녹두 갠 물을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이보시오. 정신을 차리시오. 좋은 집안에 높은 벼슬까지 한 양반님아. 장가가서 자손도 보아야 다 이루었다 할 수 있지 않겠소? 근데 혼약하는 상대마다 아프거나 죽었다는데 그 말이 참말이오? 한양 바닥에 좌승지 영감님 소문이 어떤지 아시오?”


지우는 유진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녹두 갠 물을 제 소매로 쓱쓱 닦아내며 다시 입을 억지로 벌리어 한 수저 더 떠넣었다.


“허우대는 천상의 신선 마냥 아름다운데 재수 없는 일‘만’ 연달아 생겨 한양의 아씨들 마음을 ‘찢’어지게 하는 ‘남’정네라 하여 ‘만찢남’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독살되어 죽었다고 소문이 나보십시오. 마음이 천 길 만 길 갈가리 찢어져 쓰러진 아씨들 때문에 운종가는 걸어 다니지도 못할 겁니다. ...물론 우리 효원각의 도현이도 그쪽 못지않게 이 동네에서 인기가 많기는 합니다만 내 오늘 보니 음...”


그때 지우는 유진의 손가락이 까닥이는 게 눈에 보였다.


“이제 정신이 드시는 겁니까?”


유진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네? 무어라 하시는 겁니까?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지우는 유진의 입술에 제 귀를 바싹 가져가 귀를 기울였다.


“시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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