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붉은 점

흑두루미 집안

by 은송하

유진은 머리가 무겁고 속이 쓰렸다. 바닥은 차갑고, 목이며 허리가 뻐근했다. 머릿속에서 공주의 음성과 낯선 계집애의 음성이 섞여 날카롭게 헤집고 다녔다.


‘아. 숨 막혀.’


무언가 제 가슴을 강하게 누르고 있었다.


‘중독 후유증인가? 아니야. 뭔가가 있어.’


유진은 실눈을 뜨고 팔을 움직여 제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을 손에 쥐었다. 딱딱하기만 할 줄 알았던 그것은 유진의 큰 손안에 다 들어오며 의외로 보드라웠다. 저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본능적으로 몸에 열기가 번졌다.


제 가슴팍에 올려져 있는 그것은 지우의 다리였다. 버선은 벗겨져 발끝에 걸쳐져 있고 드러난 복숭아뼈가 살굿빛을 띠고 있었다. 복숭아뼈 옆에는 붉은 점이 박혀있었다. 치마와 고쟁이가 들춰져 무릎까지 드러나 있는 걸 보고서는 눈을 질끈 감고 마른 침을 넘겼다.


‘이런! 내 머릿밑에 있는 것도 여인의 다리인 것 같은데. 어제 그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계집애의 다리인가?’


지우가 몸을 살짝 틀자 유진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계집애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유진은 빠져나오려 몸을 살살살 움직였다. 가까스로 벽에 걸터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효원각도 내 집도 아닌 것 같은데.’


작은 몸뚱어리가 유진의 눈에 밟혔다. 유진의 체온에서 멀어져 계집애는 잔뜩 몸을 웅크렸다.


‘날 살리려고 한 건가? 아니면 내게 무슨 해코질이라도 하려고 여기를 데려온 것인가?’


유진은 제 옷매무새가 그대로인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가 무슨 의도였던 간에 내가 저 아이와 하룻밤을 보냈다면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하겠지? 그냥 놔두고 내뺀다면 그건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지우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도 한기가 드는지 몸을 덜덜 떨었다.


“밤새 추웠던 건가? 그러고 보니 옷이 얇구나.”


유진은 지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제야 지우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눈두덩이는 두툼하고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 얼굴이 못나 보이지만은 않았다.


“시끄럽게 굴었던 것은 무서워서? 아니면 나를 깨우려고? 어쨌든 간에 기특하구나. 네가 원한다면 허수아비 첩이라도 시켜 주마. ...다른 아씨들처럼 죽을까 봐 겁나려나?”


유진은 쓰게 웃었다. 세 번째 정혼자인 평양 부윤의 딸도 아프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으니 말이다.


“좌승지 영감. 죽으시면 안됩니다. 입을 벌려요. 이렇게. 아...”


지우가 갑자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잠꼬대를 하자 유진은 저도 모르게 ‘풋’하고 웃어 버렸다. 지우의 머리맡에 놓인 종지가 눈에 뜨였다.


“뭘 먹인 거지? ...녹두?”


유진은 앞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은우야. 나를 연모하는 너의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집착이고 광증이야. 내가 죽었다면 그 광증에서 자유롭게 될 거 같았더냐.”


유진은 지우를 뭉근히 바라보았다. 어린 하녀가 제 주인을 곤란하지 않게 하려고, 덩치 큰 사내를 어떻게든 살려보려 용을 썼구나 싶었다.


유진은 식은 땀을 흘리는 지우의 이마를 짚었다.


“이를 어째. 너무 뜨거운데!”


유진은 몸을 수그려 지우를 등에 업고 집을 향해 뛰었다. 상황이 급하니 익숙한 곳으로 몸이 움직였다. 지우가 그랬던 것처럼. 집 쪽문에 들어서 조심스럽게 제 방으로 향하는 중에 마당을 쓸고 있던 개천이가 유진을 발견하고 냅다 뛰어왔다.


“도련님! 어제 집에도 안 들어오시고 이게 어찌 된 일이어요! 이 여자는 뭐고요? 공주 자가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개천은 사실 혼인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아 지난밤에도 마누라와 깨가 쏟아져 유진이 안 들어온 것을 유진의 기침 시간에 맞춰 세숫물을 들고 가서야 눈치챘었다. 슬며시 유진의 등에 업힌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이리 못생겨서야 어디에 써먹는답니까!”


“무슨 소리인 게냐? 나를 돕다가 아파 쓰러진 아이다. 어서 의원을 모셔오거라! 입이 무거운 자여야 할 것이다.”


유진은 지우의 다리를 꼭 감싸 안았다.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유진은 지우를 제 방의 보드라운 이불 위로 눕히고 여직 떨고 있는 작은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효원각에서 그 집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데 이리 가냘픈 몸으로 나를 어찌 옮긴 것이냐. 그 집에 귀신이 쓰였다는 소문이 나서 폐가가 된 지 오래이니 그 집으로 날 옮긴 걸 보면 너는 영특한 아이가 틀림없다. ...우리의 얘기를 엿들은 자가 너구나!”


유진은 누군가 저들의 말을 엿듣고 있음을 눈치챘었다. 자개장에서 식초 냄새와 호롱불 기름 냄새가 스며 나왔으니 말이다. 유진은 특히 후각이 예민했다.


유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은우야. 이제 우리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다. 너에게 영원을 속삭였다가 내친 나에 대한 벌은 충분히 받았어.’


한 달 뒤면 유진의 혼례다. 세 번째 정혼자다.


삼 년 전, 공주와 정혼하면서 유진은 사모하는 이와 혼인하게 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에 겨운 사내가 된 줄 알았다. 그러나 공주의 실체를 보고야 말았고 식어 버린 제 마음이 들키자 공주는 아프기 시작했었다.


선왕이 죽고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시면서 결국엔 혼담을 물리었다.


두 번째는 영의정 권도강의 손녀였다. 혼담이 오고 가면서부터 권도강의 손녀도 아프기 시작하더니 자다가 돌연 죽었다. 영의정의 손자는 지방 관청에서 도박장의 뒤를 봐주어 관직을 박탈당했다.


이쯤 되니 한양의 권력가들과 부자들 사이를 오고 가는 중매쟁이들 사이에서는 유진의 집안이 제아무리 조선의 으뜸가는 집안 중 하나이고 유진이 뛰어난 인물에 또래 중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인재라 하더라도 남편감으로서의 유진이 기피 일 순위였다.


엮기면 사람이 아프고 집안에 우환이 드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 규수의 집안은 삼대째 지방 관청을 돌아 한양에 입성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규수의 오라비가 유진의 아버지, 준성의 성균관 제자인지라 줄이 닿았다. 혹시나 하였으나 역시나 그 집 아가씨도 지금 시름시름 앓고 있다.


‘어찌 이리 식은땀을 흘리누.’


유진은 문갑에서 흑두루미가 수 놓인 손수건을 꺼내 지우의 땀을 닦아주었다. 지우의 이마에 재차 손을 댔다가 뗀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개천이 밖에서 유진을 불렀다.


“도련님.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의원은 유진의 방으로 들어와 지우를 진맥했다. 과로하여 몸살이 난 것이니 쉬면서 약을 달여 마시면, 나흘이면 깨끗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약방에 오면 사흘치 약을 지어줄 터이니 가지러 오라 하였다.


유진의 낯빛을 보고서는 유진에게도 약을 지어줄 터이니 무리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저 의원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도련님도 약을 먹으라니요? 그러고 보니 도련님 얼굴도 하루 만에 많이 상하셨습니다.”


개천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괜찮다. 효원각에 가서 내가 어제 많이 취하여, 하녀 하나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고 일러라. 그 아이가 풍한에 든 것 같으니 내 집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보내주겠다고 하고.”


“네.”


지우에게 약을 먹이고 한 시진쯤 지났을까. 지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아. 어제 내 힘을 너무 과신했어. 며칠 동안 묵사집(경선진 저, 조선시대 수학책)을 푸느라 잠도 설쳤더니. 정신없이 잠들어버렸어. 영감은 괜찮으려나? ...아야야.”


지우는 조금만 움직여도 삭신이 쑤셔 낮게 신음을 뱉고 말았다. 방 안에 좋은 물건이 가득한 것이 효원각 어느 방에 누워있는 건가 했다.


‘집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좌승지 영감은 날 혼자 두고 내뺐나? 거 하여간 정 없는 인간이군.’


“어?”


한 손이 따스했다. 큼지막한 손이 제 손을 꼭 감싸 쥐고 있었다.


“도현? 오라비라 불러줬다고 손을 잡은 것이야? 오해한 것이다. 내가 오라비라 부른 것은 그저 네가 나이가 많다고 가끔 거들먹대길래 한 번 불러준 것일 뿐이야.”


지우는 옆을 돌아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이 양반이 왜?”


유진은 지우의 손을 꼭 붙잡고는 맨바닥에 누워 곤히 자고 있었다.


“깼느냐?”


유진은 지우의 손을 잡은 채로 다른 손을 쭈욱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직은 몸 상태가 전 같지 않았다.

지우는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좀 전에 놀랐던 것과는 다르게 무심히 답했다.


“응.”


이 남정네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밀도 있게 흘러가 그런 것인지, 유진에게 해준 수고가 많아 그런지 만만해졌을까. 아직 몸살기에 힘이 없어 정신 줄을 놓은 게다. 약 기운에 정신 줄을 놓은 게다. 저에게 가까운 남정네들에겐 늘 말을 편하게 했던 버릇이었다.


“응?”


“응.”


“으응?”


“아. 아! 아! 나으리 죄송합니다.”


지우는 퍼뜩 유진에게 잡힌 손을 빼고 일어나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짙푸른 비단 금침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끼는 좋은 감촉이었다.


“제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봅니다. 그게... 어제 쓰러지신 걸 보고. 거기 그대로 계시면 곤란하실 듯싶어 멀찍이 폐가로 모시고 갔습니다. 살아계신 걸 보니 천만 다행입니다.”


지우는 제가 가짜 신분인 것이 생각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하도록 엉덩이를 더욱 쭉 내빼고 코를 바닥에 붙이며 조아렸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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