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갈한 향내

나도 잠결에 부를까? 어머니.

by 은송하

유진도 앉으며 말했다.


“의원에 데려가지 않고.”


“...그러게요. 제 주제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북촌의 폐가 이야기를 며칠 전 들은 것이 생각나서 그만.”


‘의원에게 데리고 갔다가 내가 곤욕을 치루면 어찌하려고. 혹 죽었다면 내가 다 뒤집어썼을 것이다. 여기서 어서 나가야 해! 살았다면 고맙다는 말이 먼저가 아닌가? 좌승지도 공주와 비슷한 인간인가 보군. 그냥 길거리에 버려둘 걸 그랬나? 타락산에 묻히든 말든 놔둘걸. 괜히 귀찮게 됐어.’


지우는 유진이 어서 저를 빨리 보내주기만을 기다렸다. 효원각에는 적당한 말을 둘러댔으나 집에서 끝명이와 아비가 걱정하며 기다릴지도 몰랐다. 정확히는 끝명이만.


유진은 제 손을 오므렸다 폈다. 좀 전에 지우의 손을 잡았던, 제 손안에 가득 찼던 손의 감촉이 조금은 그리웠다.


자고 있던 지우가 잠결에 불렀다.

엄마.


아무래도 저 계집아이는 잠꼬대가 버릇인 듯했다. 일이 고되니 그러려니 했지만, 엄마를 불렀다. 아련히. 유진은 자신도 자는 중에 저도 모르게 부를까 싶었다.

어머니.


유진은 망설이다 지우의 손을 잡았다. 지우는 세게 물고 있던 어금니를 풀며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같은 미소를 띠더니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또 밀려오는 잠에 다시 옆에 눕고 말았다.


“네가 잡은 것이다. 잠결에.”


“네?”


지우는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꼼지락거리는 손이 보였다. 낯 뜨거웠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유진은 지우가 무엇이 괜찮은 것인지 궁금하였다. 사내에게 손이 잡히는 것 정도는 괜찮다는 말인가? 혼례를 치룬 뒤에 지우를 거둘 참이었다. 혹여 저와 한 방에 있었다고 말이라도 새어나가면 흉한 소문에 시집도 못 갈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을 해주었거늘. 괜찮다니?


“제가 자는 중이라 하였어도 결례를 범한 건 저이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들어도 된다.”


“아닙니다. 어찌 제가 높으신 양반댁 자제의 얼굴을 뵙겠습니까?”


“날 살리었으니 널 그냥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으냐.”


‘그건 그럽죠!’


지우는 고개를 조금 들어 눈만 위로 치켜들며 유진을 슬쩍 보았다. 공주가 반하고 독약을 먹일 만치 갖고 싶을 만 해 보였다. 어둑한 데서 윤곽만 봐서는 잘 몰랐었는데 수려한 미남자였다.기개가 넘치는 눈에 부드러운 하관, 남자답게 떡 벌어진 어깨며. 하... 벌어진 저고리 사이로 보이는 가슴이 아주 먹음직... 아니 멋들어져 보였다.


유진은 지우가 제 가슴을 유심히 보는 게 느껴졌다.


“지금 어디를 보는 것이냐?”


유진은 서둘러 저고리를 여미며 물었다.


‘보라고 할 때는 언제고. 한양 만찢남이 아니라 또라이인가?’


지우는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어디까지 들었느냐?”


“들었다니요? 심부름을 언제 시키실까 하여 객주께서 대기하고 있으라 하셨는데, 아가씨께서 나가시고 영감님이 나오시질 않으셨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으시자 걱정이 돼 들어갔다가 쓰러져 계셔서.”


“먼저 나간 그 사람은 철두철미한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다 물리라고 하였을 텐데.”


“...”


“그리고 나에게 녹두를 먹였던데. 비상이나 독약 같은 걸 먹은 줄 어찌 알고?”


“저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습니까? 쓰러진 자에게 녹두가 좋다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어 그럽니다.”


지우는 진땀이 났다. 어서 집에 가서 끝명이가 끓여주는 죽이나 먹고 퍼질러 자고 싶었다.


“넌 오늘, 나가지 못한다. 며칠은 여기서 지내야 할 것이야.”


“네? 그게 무슨. 저는 영감님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지우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유진을 뚫어지라 보았다. 쌀이나 한 되 쥐여주면 이건 되었다 하면서 공주 자가를 한 번만 봐달라는 말만 하고 갈 참이었다.


“다 들은 것이 확실하구나. 눈빛을 보니. 내 패를 움켜쥔 듯 확신에 차 있구나.”


지우는 손을 세차게 비벼가며 간청했다.


“영감님. 저는 평생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지내겠습니다. 저희 집에는 나이 드신 노부와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이 있사온데 노부의 성격이 괴팍하여 제가 옆에 있지 않으면 역정을 내실 겁니다. 몸도 편찮으십니다.”


지우의 아버지 백단은 지금 지우가 풀 수 없는 마방진을 만드는 중이었다. 지우가 풀 수 없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져 음침하게 실실대고 있었다.

.

“그리고 저는 효원각에서 일하고 있는 몸이라 이렇게 저를 붙잡고 계시면 저는 돈도 못 벌고 제 오라비의 빚도 갚지 못합니다.”


“빚?”


“오라비가 불한당 같은 놈들에게 사기를 당해서.”


유진은 자기 집 하인들보다 훨씬 허름한 지우의 옷을 훑어보았다.


“여러모로 딱하구나.”


“그럼 이만.”


“효원각에서 일한만치 내가 너에게 쳐줄 것이다. 아니, 내가 더 쳐줄 것이다. 그리고 네 노부는 우리 집 하인에게 가서 살펴보라 하겠다.”


“아닙니다. 저까지 사고를 친 줄 아시면 어쩝니까? 그리고 제가 받는 삯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그러십니까?


유진은 지우에게 제 재력이 무시 받는 건가 하고 되물었다.


“얼마면 되느냐?”


술 빚는 거며 정산을 하는 거며 그 삯이 보름이면 세 냥은 족히 되었다. 게다가 달포 동안 이화주가 팔리는 것의 팔푼을 더하여 받았다.


“보름에 열 냥이요.”


지우는 일단 그리 불렀다.


“뭐라? 종 9품 관직이 받는 녹봉이 쌀 10말에 콩 5말이다. 네가 관리보다 더 번다는 말이냐?”


“그리 나라에서 짜게 주시니 그분들이 백성들의 것을 탐내는 것 아닙니까. 백성들에게 세경을 어찌 더 받을까 눈에 쌍심지들을 켜시고요.”


“용기가 있는 것이냐 무모한 것이냐? 내 앞에서 입을 잘도 함부로 놀리는구나. 네가 무슨 일을 하기에 효원각에서 그리 많은 돈을 주고 널 데리고 있는 거지?”


“술을 잘 빚습니다. 산수에 능해 객주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럼 그 이화주로 만든 요거타 라는 것도?”


“네. 제가 개발한 것입니다. 양조장 창문 위치를 계절마다 부는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여름에는 맞바람이 불어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여 일 년 내내 이화주를 빚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특히 발달한 예(藝)적 감각을 이용해 달마다 달리 피는 꽃으로 장식을 하였으니 이게 또 아씨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지우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뿌듯한 미소로 제 공로를 읊기 시작했다.


‘정말 시끄러운 계집이군. ...그러나 북촌의 여느 집 규수보다 똑똑한 아이다. 그렇다면 네가 날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잘 되었다. 내 그것이 내 입에 딱 맞아 좋았던 참이다. 이화주를 희석해 백설향(白雪香)으로 만들어 마시는 것도 별미라 들었다. 내 혼례 때 그것을 내놓거라.”


“그건 배꽃을 넣어 빚은 술입니다. 제가 만든 건 그저 배꽃이 필 때 담근 술이고요. 그러나 제가 만든 이화주도 소주를 조금 섞어 먹으며 그게 또 캬아~. 술을 원하시면 효원각에 말씀하시는 것이.”


“네 노부가 관아에 끌려가 고초를 치러야 순순히 말을 듣겠느냐? 말이 많은 계집이구나. 내가 너에게 인내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이야?”


지우는 ‘고초’라는 말을 듣자 맥이 풀렸다. 5년 전 그날의 기억에 몸이 경직되었다. 마당에 들어섰던 세자는 백단 옆에 서 있던 지우와 오라버니인 성우를 보고 말했다.


“아들 둘이 이렇게 늠름하게 잘 커가니 집안의 장래는 걱정하실 것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미소는 온화했다. 지우에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가 만약 여자였다면 저는 세자빈을 삼아달라고 전하를 졸랐을 겁니다.”


후에 아비에게 야단을 들었다. 세자 앞에서 얼굴을 붉혔으니 말이다. 그리고 새벽, 세자에게 아침 진지를 어떻게 할지 물으러 간 끝명이가 서까래에 줄을 걸고 목을 매 죽어 있던 세자를 발견했었다.


백단은 고초를 겪었고 관직을 박탈당했고 집은 관아에 넘겨졌었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한 것만도 천만다행이었지만 그 다행으로 인해 백단은 다음 보위에 세자의 동생인 이휘우를 올리기 위해 그런 짓을 꾸몄을 거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대비와 척을 지게 되었다.


“좌승지 영감~. 살려주십시오.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신단 말씀입니까? 저는 영감을 구한 것밖에 없습니다.”


유진은 바들바들 떠는 지우를 보며 언성을 너무 높였나 싶었다. 약첩을 지우 앞에 쓰윽 밀었다.


“이틀 뒤에 오거라. 네 노부에게 이 일을 알리고 효원각에 사정을 말할 충분한 시간일 것이다. 네가 왔을 때 내가 없더라도 개천이 네게 할 일을 알려 줄 것이다. 내가 일러주는 걸 네가 잘 해내면 네가 원하는 열 냥뿐만 아니라 더 쳐줄 수도 있다.”


지우는 고개만 끄덕이며 약첩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돈을 더 쳐준다는 말에.


“도련님~. 효원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소 객주라고 합니다.”


밖에서 개천이 도현이 왔음을 알렸다.


도현!’


지우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착한 일을 해서 복이 굴러오기는 커녕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다 이 집에 매이게 되었다. 살려준 은공을 봐서 공주 자가를 좀 봐달라는 말도 못 했다.


“저를 데리러 왔을 것입니다. 그럼.”


지우가 발을 떼자 휘청거렸다. 유진은 빠르게 지우의 어깨를 감싸며 움켜쥐었다.


“갈 수 있겠느냐?”


‘소 객주가 직접 데리러 올 정도로 효원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건가? 이 계집에게서는 묵향이 난다. 차림새와는 다르게 정갈한 향이 나. 상것이 아닌 건가?’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약 감사합니다. 이틀 뒤에 뵙지요.”


지우는 몸이 마음처럼 잽싸게 움직이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천천히 별채 마당으로 내려가는 지우의 뒷모습을 유진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개천의 뒤로 고운 초록 도포를 입고 들어오는 선이 곱고 아름다운 도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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