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단오에 다시 만날까.

사이의 견고함

by 은송하

도현은 유진과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깊이 구부려 인사했다. 도현의 손에는 봇짐 하나가 들려있었다. 마루를 내려오는 지우를 보더니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지우는 얼핏 보아도 아픈 기색이었다. 팔을 두르려다 차마 손을 얹지 못했다.


도현은 뒤돌아 유진에게 한마디 하려다 개천을 보며 건조하게 ‘가보겠습니다.’하고 말았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사내를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것이냐?’


유진은 도현과 함께 나가는 지우를 꽤 묵직하게 보다가 지우가 잠결에 읊던 묵사집의 문제가 생각나 제 방으로 들어가 서책을 뒤졌다.




대제학의 집, 별채와 연결된 문 앞에 말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지우는 말을 보더니 도현을 향해 힘없이 물었다.


“내게 줄 돈에서 뺄 거야?”


“뺄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고 타십시오. 가는 길에 주막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가십시오. 효원각에 놔두신 옷과 쓰시던 세안 기름을 가지고 왔습니다. 주모가 저와 친분이 있는 이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현. 나 혼자는 못 탈 거 같아.”


도현은 지우를 번쩍 안아 들고 먼저 말에 태운 뒤에 그 뒤로 자신도 올라타 말의 목줄을 잡았다. 지우는 도현의 가슴에 힘없이 기대었다. 도현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인적 드문 골목으로 이리저리 다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마를 가지고 올 걸 그랬습니다.”


“아니야. 네가 와 준 것만도 고마웠어.”


“...”


“충의원에서 어떤 아씨와 좌승지 영감이 만나 얘기를 나누다가 아씨가 먼저 나가고 영감님이 쓰러지셔서 옮겼는데 나도 병이 났지 뭐야. 며칠 잠을 못 잤었거든.”


“저를 부르셨어야지요.”


“일이 있어 나갔다 온다고 했었잖아.”


“기다리셨어야죠. 책에 너무 빠져도 건강 상한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씨름대회에 네 명이 나와 그중 한 명은 아내가 출산한다고 빠져서 삼등을 한 걸 가지고 아직도 의기양양하고 계신 겁니까?”


도현이 화가 난 것 같아 지우는 배에 힘을 주며 허리를 세웠다. 기분도 좋지 않은데 저까지 기대고 있으면 짜증이 날 것이다. 도현은 저에게서 멀어지는 지우에게 섭섭했다. 힘들 때마다 지우는 기대는 법 없이 더 멀어졌다.


“우리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하지 않는 잔소리를 너만 해. 도현. 객주는 아무 말 없었어?”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효원각에서 놀다가 자고 간다고 댁에 전하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분은 왜 쓰러지신 거랍니까?”


지우는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영감님이 서양 홍시를 처음 드셨대. 몸이 안 받는 것인 줄 몰랐던 거지. 그래서 호흡이 가빠지면서 쓰러지신 거야. 내가 물을 먹이고 다 토하게 해드리니 진정되긴 하셨지만 그래도 혼자 집에 갈 정도는 안 되셔서 내가 모셔 드린 거. 여인네가 나갈 때 같이 나가시지 않고 혼자 남아서 그걸 또 다 드시다가. 식탐이 있나 봐~!”


“그랬군요.”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도현은 흔쾌히 수긍을 해주었다.


“영감님이 혼례를 앞두고... 어... 좋아하던 여인에게 마지막 고백을 했는데, 여인은 지금 자기더러 첩으로 들어오라고 한 거냐고 울며불며 뛰쳐나가지 뭐야. 그 여인네는 형편이 좋지는 않지만, 자존심 강한 양반댁 규수였던 거지. 좌승지 영감은 정략결혼을 앞두고 고민이 많았던 거야! 사랑이냐 가문이냐.”


졸지에 유진을 점잖지 못한 관계를 맺고 가문에 얽매여 정인에게 우유부단한 남자, 혼자 남아 남은 음식을 다 먹어치운 식탐 가득한 멍청이로 만들어 버리니 지우는 왠지 고소해 씨익 웃었다.


“객주가 알면 한강에 버려 물고기 밥으로 만들거나 산에 묻어 구더기 밥으로 만들 것 같아서 말이야. 아무리 좌승지라지만 효원각 음식 먹고 탈 났다는 소문내는 걸 객주가 눈 뜨고 가만히 보겠어? 그래서 객주에게 영감이 술이 취해 데려다주니 아버지께는 일이 있어 못 간다고 전해달라는 서신을 남긴 거지. 밤이 늦어 어찌 될는지 모르니 말이야.”


도현은 지우의 입에서 좌승지 영감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지우가 되려 신나 보이는 것이 신경쓰였다.


“몸 좀 추스르시고 며칠 쉬다가 나오셔요. 칠복 어멈이 전에는 술 빚는 거에 관심 없으시더니 요즘엔 꽤 맛을 흉내 내시고 재미를 붙이신 듯하니 말입니다. 이번에 한 번 맡겨보지요.”


“도현. 나 좌승지 영감댁에서 일하게 됐어.”


“네?”


도현은 잠시 말을 멈춰 세웠다. 지우는 몸이 기우뚱하며 도현의 팔을 잡았다.


“내가 만든 술이 마음에 드셨다고 술을 빚으러 오라 하셨어.”


지우는 자신이 어디 가서 공주와의 일에 대해 떠벌릴까 염려되어 유진이 술 핑계를 대고 붙잡고 있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혼례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혼례 때 필요한 술이나 빚게 하면서 감시하려고.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지 싶었다.


“도련님도 원하는 일입니까?”


“보름에 열냥을 준다지 뭐야.”


“도련님!”


다시 말을 몰아 어느새 주막에 당도한 지우는 얼굴을 깨끗이 씻고 사내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말에 올랐다.

도현이 말을 끌며 지우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서산에 해가 넘어가고 남촌의 조용한 외곽에 있는 지우의 집에서는 끝명이가 밥을 하는지 아궁이에서 나무 타는 냄새가 정겹게 났다.


“저녁 먹고 가.”


지우는 오는 내내 도현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 그리 말하였다. 사내의 옷을 입어 그런지 지우의 음성은 소년과 청년 그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말도 길지 않았다. 도현은 끝명이의 음식 솜씨를 알기에 군침이 돌았지만 참았다.


“가서 일해야지요. 오늘은 청나라에서 온 거상들 중 일부가 저희 여각에 머물 겁니다. 육의전으로 들어갈 비단들을 보았는데 때깔이 정말 좋았습니다. 어서 가봐야 합니다. 좌승지 영감댁에서 일하게 된 건 제가 객주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몸도 성치 않으시니.”


도현은 지우를 빤히 보는 유진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지우의 말과 같이 혼례 전에 여인을 만날 사람도 술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지우를 뚫어지라, 다정인가 의심이 들게 보았다. 호기심이었을까? 곁에 두려는 저의가 뭘까?


“시간 날 때마다 갈게.”


눈두덩이가 가라앉아 어여뻐진 눈으로 한꺿 초승달을 그리며 지우가 말했다. 도현의 마음이 녹았다. 내가 찾는 사람은 늘 ‘너’야 하는 눈.


“네. 저기 이거.”


“뭐야?”


지우는 도현이 내미는 연분홍 빛깔의 보자기를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옷입니다. 두 벌. 한 벌은 일할 때 입으시고 한 벌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입으세요.”


“중요한 일?”


“단오나. 생일에? 언젠가는 필요한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네 생일이 단오잖아. 몰래 이 옷을 입고 효원각에 가 술 한잔 따라주마. 물론 아무도 없는 양조장이나 손님이 없는 충의원에서겠지만.”


“단오에 만나는 거 약속하신 겁니다!”


“응.”


도현은 창포가 그려진 부채를 꺼내 부채질을 했다. 아직 여름이 오려면 한참이 남았는데 벌써 더워지는 듯했다. 연분홍 소맷단의 하얀 저고리, 진달래 빛깔의 치마를 입고 그네를 타는 지우가 넘실대며 제 옆을 스칠 것을 생각하니 구름 위를 걷는 듯 마음이 둥실거렸다. 유진의 눈빛 같은 건 아무렴 했다.


“고맙게 잘 입을게. 선물 맞지?”


“의심하지 마시고 편하게 입으십시오. 선물 맞습니다.”


“고마워. 오라버니.”


“아~. 선물 앞에서는 오라버니라는 말이 술술 나오시는군요.”


“또 듣고 싶으면 선물을 내놔! 저녁 안 먹을 거면 빨리 가!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지우가 손을 들어 인사하자 도현은 말을 타고 돌아갔다. 마당에 들어서자 어디서 씨가 날아온 건지 민들레며 애기똥풀이며 꽃이 가득했다.


“하루 안 들어 왔다고 집이 이리 달라 보이나? 꽃은 언제 이렇게 많이 피웠대?”


방 세 칸 중 아궁이에 가장 가까운 안쪽 방에서 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 남자는 머리가 허옇게 세고 눈가의 주름이 깊었다. 주름만큼이나 사물 하나하나에 둔 시선도 깊었다.


“지우~ 이제 오니!”


“네 아버지. 막내 아들 지우 이제 도착하였습니다.”


지우는 도현이 준 봇짐을 뒤로하고 공손히 답했다. 도현에게 여인의 옷을 받았다고 하면 아비에게 한참 꾸중을 들어야 할 것이었다.


“어머! 도련님. 이제 오셨어요?”


끝명이가 부엌에서 소리를 듣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왔다. 5년 전 그 일로 고문을 받은 흔적이다. 열여덟 살이 되어도 여태 혼담이 들어오는 집 하나 없이 지우네 집 살림을 맡고 있었다. 한 번 기울어진 가세는 끝명의 절뚝거리는 다리처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점점 더 휘청이기만 했다.


“효원각에 일이 많아서 말이야. 오늘 청나라에서 상단이 도착해 궁금하긴 한데 몸살이 나서 좀 쉬어야 할 거 같아.”


지우는 약첩을 들어 보였다.


“소 객주께서 사주신 거군요.”


“나 데려다주러 왔었는데 못 본 게야?”


끝명은 수줍게 고개를 저었다.


“어서 진지 챙겨 올리겠습니다. 쑥국을 끓였는데 맛이 나쁘지 않아요.”


“끝명이가 한 거니 맛있겠지.”


“내일도 효원각에 가시는 거여요?”


“뭐. 봐서.”


“지우야. 이리 들어오너라.”


백단은 이리 말해 놓고 문을 꼭 닫았다. 단단히 마음먹고 들어와다 한다는 듯이 말이다.


“네. 아버지.”


끝명이가 몇 번이나 훔쳐냈는지 마루에 윤이 반지르르 났다. 그런 마루에 어느새 올라온 지푸라기를 지우는 마당에 던지고서 장마가 오기 전에 지붕에 올라가 이엉을 다시 잘 묶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몸은 어떠하냐? 약까지 지어온 걸 보니 많이 안 좋은 듯한데.”


허리를 꼿꼿이 세운 백단이 지우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아버지.”


“...”


“저에게 부탁이 있으십니까? 적응 안 되게 왜 안부를 물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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