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함이 허락된 사람.
공주는 부마 후보들의 초상화들을 보러 오라는 왕의 전갈을 받고 사정전(思政殿)으로 향했다. 장 숙원의 치성환을 먹고서 겨우 힘을 냈으나 그것도 효험을 발휘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불안감이 엄습했다.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장 숙원을 찾아가 서서히 죽어갈 수 있도록, 그 느린 죽음으로 유진을 옥죌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일까?
장 숙원의 말을 듣지 않고 장 숙원이 건넨 반짝이는 것을 많이도 오래 먹었다. 햇수로 3년째이다. 끊을 수가 없었다. 유진에게 마지막이라는 말을 몇 번이고 쓰려면 말이다. 그러면서도 살고 싶어서 장 숙원에게 치성환을 달라 졸랐다.
참으로 지랄 염병한 시간이었다. 다 유진 때문이다. 유진의 마음만 변하지 않았다면.
나 상궁이 공주의 오른팔을 받히고 공주는 천천히 걸었다. 사정전 안, 모퉁이를 돌며 미처 공주를 발견하지 못한 궁녀가 공주와 갑자기 마주치자 놀라서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다.
공주의 치맛단이 젖고 말았다. 공주는 크게 표정 변화 없이 나 상궁을 나직이 불렀다. 궁녀는 저가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미 궁 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공주에게 밑 보였다가는 궁 안에서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된다고 말이다.
“나 상궁. 이 아이가 내 치맛단을 젖게 했어.”
나 상궁은 장 숙원이 준 노리개가 치마 안에서 살갗을 간지럽히는 걸 즐거워하며 궁녀에게 다가가 뺨을 휘갈겼다.
“어디 너 따위가 공주 자가의 치맛단을 젖게 한 것이야? 경망스럽게 궐을 다니며 음험한 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냐?”
궁녀는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제 뺨을 감싸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말하지 않을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말을 하면 혹여 살 기회가 올까 싶었다.
“아닙니다. 마마님. 정말 실수로.”
“나 상궁. 이 아이가 죄송하다는 말은 잊은 모양이다. 너는 보이고 나는 안 보이는 모양이야.”
“공주 자가~.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미처 마마를 보지 못한 쇤네를 용서해 주소서. 놀라서 그랬습니다. 정말 놀라 그런 것입니다.”
궁녀는 불에 떨어진 듯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데려가서 볼기를 30대 치고 벌거벗겨 환관들의 거처에서 반나절을 있게 하여라.”
“마마. 안됩니다. 그러지 마시어요.”
궁녀는 고개를 크게 흔들며 흐느꼈다. 소리내서 울었다가는 더 큰 화가 미칠까 두려웠다. 궁녀의 떨림이 까끌한 몽돌을 씻어내는 잔잔한 파도같이 복도를 퍼져나갔다.
“예쁘게 생겼구나. 환관들도 궁금했을 게다. 네 벗은 모습이.”
“공주 자가! 제발 살려주시어요. 네~! 살려주시어요~.”
나 상궁은 이런 울부짖음이 익숙한 듯 공주와 같이 표정 변화 없이 뒤에 있는 궁녀들에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궁녀들이 앞으로 나와 찻잔을 떨어뜨린 궁녀의 양팔을 잡아채 일으켜 세웠다.
그 일련의 모습을 뒤에서 다 지켜보던 유진은 지난날이 떠올랐다. 과거 급제를 하고 공주, 은우에게 반하여 관직을 포기하고 부마가 되는 걸 선택하였을 때 아버지 준성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관직을 포기하려고 하니 말이다.
이미 딸 재희를 광렬 대군, 즉 지금의 주상에게 시집 보냈다. 심약하고 숫기가 많은 딸은 대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여태껏 왕손을 낳지 못했다. 아들까지 왕가에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군신관계보다 더 치열하고 잔혹한 것이 왕족이었다.
공주 자가의 성정이 유진과 맞지 않을 거라고 아들에게 간곡히 부탁까지 했지만, 유진은 곧이듣지 않았다.
공주를 연모하는 마음이 깊었다.
고운 얼굴에 단아하기 그지없는 말씨, 게다가 아랫사람을 위하는 마음 씀씀이에 유진은 공주에 대해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날은 당직이었다. 공주가 보고 싶어 한밤중 몰래 그 처소로 갔었다. 그때도 나 상궁이 공주를 모시고 있었다. 공주의 처소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겼지만 잘 시간이니 그런가 보다 했었다. 조용히 얼굴만 보고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소리를 질렀다가는 너와 궁 밖의 너의 가족들이 모두 왜국에 노예로 팔려갈 줄 알아라.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너는 몸을 팔고 네 어린 동생들은 광산에서 매를 맞으며 땅을 파겠지.”
유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감히 부마가 될 내 낭군님께 음탕한 눈짓을 해? 손톱에는 봉숭아 물을 들이고 말이다.”
유진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 궁녀가 자신과 눈을 마주쳤는지 곱씹고 곱씹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저런 질투를 다 하다니. 말뿐인 협박이겠거니 하며 그때까지만 해도 귀엽다고 여겼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귀여운 제 색시를 찾아 눈알을 굴렸다. 공주는 직접 바늘을 가지고 궁녀의 손톱 아래를 찌르고 있었다. 유진은 공주의 표정을 보고 얼굴이 굳었다. 공주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궁녀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꽉 깨물다 혀를 깨물었는지 잇새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얼마 못 가 까무러쳐 쓰러졌다. 그런데도 나 상궁이 그 궁녀의 손을 들어 공주 앞에 내미는 것을 보고 유진은 제 팔이 덜덜 떨렸다.
“네가 쓰러진 척을 하면 내가 그만둘 줄 알았느냐?”
그 말을 듣고 유진은 저 궁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유진은 소리쳤었다.
“은우야! 정녕 네가 맞느냐?”
유진은 여전히 독한 짓을 멈추지 않는 공주를 향해서 나지막하게 그러나 충분히 눈치챌 만큼 화를 담아 입을 열었다. 유진의 목소리가 사정전 복도를 지나 공주의 귓가에 닿았다. 질리다 못해 싸늘해진 음성. 효원각에서 만난 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공주 자가. 저 아이가 실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공주는 제 치맛단을 꼭 쥐었다. 제 치맛단이 젖었는데도, 봄기운이 가득한 4월에 뼛속까지 냉기가 드는 저를 생각해주지 않는 유진이 미웠다.
“제 치마가 젖었습니다. 이 치마에 수 놓인 사과꽃은 장 숙원이 저의 쾌유를 빌며 수놓은 것입니다. 아끼고 아끼다 오늘 좌승지께서도 오신다고 하여 꺼내 입은 것인데, 그런데도 이 아이가 잘못이 없다 하시는 겁니까?”
“부모 후보들을 보러가는 길입니다. 말씀을 가려 하십시오.”
공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진과 눈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 게 뻔했다. 갖지 못할 바에야 죽이겠다는 걸 들켰으니 말이다.
“저에게 빚이 있으시니, 그 빚을 갚는 셈 치시고 저 아이를 놓아주시지요.”
“왜 맨날 제가 잘못되었다 하십니까? 왜 맨날 저만 나무라십니까?”
“공주 자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안에 계신 분들께 공주 자가께서 하신 일을 다 아뢰어야겠습니까?”
공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상궁. 그 아이를 놓아주게.”
공주는 눈 밑이 바르르 떨렸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서서히 걸을 수밖에 없는 제 걸음이 원통하면서도 그 걸음 하나하나에 유진의 눈길이 닿길 바랐다. 유진은 공주가 진정될 때까지 뒤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공주가 들어간 뒤에야 뒤를 따랐다.
부마 후보로 올려진 다섯 명의 초상화 앞에 왕과 중전, 대비와 공주, 장 숙원이 쪼르르 앉아있고 유진은 문 앞에 정중히 앉아 주상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유진은 제 매부가 될 뻔한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네 일이니 너도 와야지.’라며 이 자리에 부른 왕을 냉정하다고 해야 할지 털털하다고 해야 할지 짓궂다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 얄궂다고 생각하고는 주상에게 무언의 불만을 던졌다.
오늘따라 주상의 턱수염은 더욱 반질거렸다. 짙은 속눈썹 아래의 저돌적인 눈빛에는 덤빌 수 있으면 얼마든지 덤벼보라는 기세가 가득했다. 유진을 향해 주상은 눈썹을 까닥이며 옆에 앉은 여인네들을 가리켰다. 이들 중에 편한 이가 아무도 없으니 오늘은 좀 봐달라는 뜻이다.
“좌승지.”
“네. 전하. 하명하소서.”
“지금 여기에서 부마 후보를 둘로 추릴 겁니다. 의빈부(儀賓府, 공주·옹주·군주·현주 등과 혼인한 부마의 관서)에 알리고 초상화를 내일 조회에 보여 최종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네. 전하.”
주상이 오 상선에게 손짓하자 상선은 말려져 있던 초상화를 하나씩 펼쳤다. 오 상선은 왕의 할아버지 때부터 지금까지 왕을 보필해 오고 있어 이제 허리가 제법 많이 굽었다. 그러나 청력만큼은 여전하고 입이 무거워 오랫동안 왕을 모셔올 수 있었다.
초상화가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대비가 공주의 귀에 속닥거렸다. 이제 다섯 번째, 마지막 초상화가 펼쳐졌다.
“어째서...”
유진의 눈이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듯했다. 몸이 앞으로 기울여졌다.
‘강지우?’
“좌승지~!”
“네 전하!”
“아는 자인가? 자네답지 않게 흐트러지고 말이야?”
“책방에서 한 번 마주쳤던 자인데 인상이 깊었던 자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연이 있었군. 어쩌면 자네도 기억할지 모르겠네. 전 시강원 이사(貳師)였던 강백단의 둘째 아드님일세. 스승님의 아들~.”
지우가 어쩌다 남장을 하고 어떻게 남성으로 호적에 등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부마 후보에까지 오를 수 있단 말인가. 강백단의 아들이면 더더군다나.
‘그 집. 그래... 그 집으로 날 데리고 갔던 것도 자기 집이었기에 갈 수 있었던 거야!’
유진은 왕, 휘우를 보았다. 주상은 다섯 명의 초상화 가운데 끝에 있는 지우의 초상화만을 유심히 보았다.
“기억나는가? 할아버님이 조선의 미래가 우리에게 있다며 우리와 대신들 자녀들 중 또래 아이들을 자주 어울리게 하신 것을.”
“기억납니다.”
“그중 지우 도령이 유독 자네를 싫어했다네.”
“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주상과 지우의 초상화를 번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