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데는 순서가 없기에.
“어릴 때도 자네가 우리 중 가장 뛰어나 모든 아이들이 자네와 어울리길 바랐는데 저 아이만은 아니었어. 제 나이가 가장 어린데도 아비의 관직이 가장 낮고 숫기 많은 녀석을 챙기며 놀았었지. 자네에게는 잘난척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대비 윤씨는 주상과 좌승지의 추억이 같잖은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주상. 예조 정랑의 아들이 집안으로 보나 인물로 보나 부마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내 귀한 아들이 죽은, 망측한 집안의 자식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대비 윤씨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초상화들을 애써 공정하게 보는 척을 했다.
예조 정랑은 세금을 정직하게 내지 못했다 하여 땅 두 마지기를 소작농 다섯에게 나누어 주는 판결을 받고 주상에게는 차마 따지지 못하고 대비 윤씨에게 와 하소연을 했었다. 소작농에게 뺏긴 땅을 찾고 예조 판서를 시켜 준다면 공주의 액막이로 아들을 기꺼이 내놓겠다고 말이다. 공주가 죽어서도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대비 윤씨에게 약조하였다.
딸 은우가 무탈하게 오래 살면 좋겠지만 차도는 없었다. 딸의 죽음도 준비해야 했다. 세자가 죽고 나서 깨달았다. 결국, 자식도 소용 없다는 걸. 가는데 순서가 없으니 자기 살길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예조 정랑이 자기편이 되는 것이 나쁘지 않으니 윤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조하였다. 예조 정랑이 보낸 은괴 두 상자에 장 숙원과의 자리도 마련해 보겠다고 말했다. 장 숙원과의 자리 값으로 챙긴 돈 생각에서 대비 윤씨는 스쳐 웃었다.
공주는 초상화 중 어느 것에도 눈을 두지 않고 멍하니 유진의 옷자락을 보며 말했다.
“어의가 난 단오 전에는 죽는다고 하였소. 어차피 남편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액막이를 고르는 것 아니오? 내가 처녀 귀신이 되어 이 궁에 떠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아 이러는 거겠지.”
공주는 오늘 쓸 힘을 다 써버린 듯 몸이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옆에 있던 장 숙원이 공주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아닙니다. 공주마마가 아픈 것을 막고자 부마를 들이는 것입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이제 3년이 지났으니 공주마마께서 부군을 맞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효를 다하였으니 선왕께서 공주를 지켜주실 겁니다.”
“효라.”
공주는 ‘효’ 때문에 저와의 혼례를 파한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아무라도 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아내 구실도 못 할 텐데. 예조 정랑의 아들이면 어떻고 미치광이 노인네 아들이면 어떻습니까?”
주상은 공주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나직이 말했다. 유진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삿된 소견만 늘어놓는 제 어미와 누이에게 진즉에 질려버렸다.
“네가 죽든 살든 종묘사직을 든든히 하기 위함이다. 왕실의 혼인이 너 하나만을 위한 것이냐? 그런 앓는 소리나 할 힘으로 혼례 전에 죽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할 것이다. 네 행실이 올발랐다면 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유진의 누이이자 중전인 재희가 주상에게 눈빛을 던졌다. 주상의 차가움조차도 늘 그리웠다. 저에게 눈길을 준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첫날 밤에 생긴 첫 아이가 세상을 뜬 뒤로 주상은 제 처소를 찾지 않았다. 저 눈웃음을 살살 짓는 장 숙원이 아직 주상과 첫날 밤조차 보내지 못한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주상이 후사를 보셔야 함을, 자신이 아닌 누구의 태에서 나오더라도 감내해야 함을, 그것이 중전의 도리임을 늘 알면서도 정말로 장 숙원이나 어느 궁녀에게서 날까 초조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따뜻한 주상의 손이 그리웠다. 저 차가운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은, 백성을 대하는 그의 마음은 따뜻하기에 더 애가 탔다.중전에게 주상은 존경하는 만백성의 아비이자 은애(恩愛)하는 지아비였다.
“그게 네 누이에게 할 소리인 것이냐! 네 형 자리를 꿰차고 앉아서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네 여동생을 박대하는 것이야?”
대비 윤씨는 주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제 자식이지만 셋 중 가장 저와 맞지 않는 아이였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아이. 제 원칙이 어미의 안위보다 우선되는 눈치 없는 아이였다.
“누이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나 백성에게 저도 하나입니다. 만백성에게 하나인 것과 저에게 하나인 것 중에 제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겠습니까?”
대비 윤씨는 일단은 잠자코 있었다. 말싸움으로 어찌 당할까 해 혀를 내둘렀다. 저 여우 같은 아들이 지화를 후궁으로 들이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면 보위에 올리는 걸 주저했을지도 모른다.
“저는 강 첨지의 아들이 괜찮습니다. 인물이 셋 중에서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군요. 강 첨지는 형님이 존경하던 분이셨고 우리의 스승님이기도 하셨습니다. 첫째 아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스승님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오신다면 조정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지난 5년간 충분히 고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완전히 짐을 더시는 일로 여겨도 좋을 것입니다.”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을 가지고 입꼬리를 의식적으로 올리며 대비 윤씨부터 유진까지 찬찬히 살폈다.
유진은 자신이 이 방에 들어오기 전에 주상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특히 강 첨지의 아들 강지우는 이전에 들었던 부마 후보군에 들어있지도 않았었다.
‘전하.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대비 윤씨는 결국에 소리를 내질렀다.
“네 형이 누구의 집에서 죽었더냐! 저자의 초상화가 여기 걸려 있다는 것만 해도 내 마음이 찢어발겨지는 것을 몰라 그러느냐? 게다가 뭐가 어째? 강백단 그 살쾡이를 조정에 불러 들여?”
“...”
“요즘 우리 사이가 잠잠해 네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내가 다시 차근차근 가르쳐주랴?”
차근차근. 주상의 손끝이 사르르 떨렸다.
“형님 잘못입니다. 어디 목을 맬 때가 없어 스승님댁에서! 어머님의 아들이 어리석고 유약한 인간이었다는 걸 언제 인정하실 겁니까? 그리고 저는 이 나라의 지존입니다. 말을 자중하십시오!”
“네가... 어떻게 네가.”
대비 윤씨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강 첨지의 아들은 땅을 가꾸며 서책에 파묻혀 교류가 없이 조용히 지낸다 들었습니다. 은우를 잘 보필할 겁니다.”
주상은 이미 지우로 정해졌다는 듯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대비 윤씨는 옆을 돌아보며 장 숙원에게 한마디 보태 달라는 표시를 했다.
“오늘 이른 아침에야 다섯 분의 사주를 받아 보았습니다. 다섯 분 중에 강 첨지의 아드님이 공주 자가와 가장 궁합이 맞았습니다. 공주 자가의 사주에는 나무가 많고 그는 물이니 물 곁에 자라나는 버드나무같이 생기가 돌 것입니다.”
장 숙원은 공주의 손을 꼭 잡고서 차분히 말하였다. 대비는 장 숙원의 영역만큼은 제가 넘볼 게 못 되어 혈기를 꺾었지만 어린 년이 점점 제 말을 듣지 않으니 머리가 쭈뼛 섰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는데 이상하게 모두가 의지해 버리는 神이 되어 버린다.
“장 숙원이 그렇게 말하면야 내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상~. 대신들이 허락할지 모르겠습니다. 대제학이야 그 양반과 바둑친구라지만 그가 관직과는 맞지 않는 자유인이라며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영상과 좌상은 강백단이라면 치를 떨 것이오. 그가 뒤에서 선왕과 세자를 조종하지 않았습니까? 장 숙원과 거리를 두라고. 그래서 둘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셨지요?”
대비 윤씨는 더 앉아있어 봤자 주상과 입씨름만 더 하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콧방귀를 뀌며 어차피 주상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게 뻔하다는 신호를 주었다. 대비 윤씨는 백단이 나타나기 전까지 제 손에서 잘 놀아났던 선왕과 첫째 휘랑이 보고 싶었다.
“공주. 갑시다. 어미가 처소까지 데려다줄 테니.”
대비와 공주가 나가자 휘우는 이제 좀 편해졌다는 듯 부드러운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내일 조회에 예조 정랑의 아들 조순필과 강 첨지의 아들 강지우를 올려라.”
“네. 전하~. 의빈청에 그렇게 알리겠나이다.”
유진까지 물러갔음에도 장 숙원이 꼼짝하지 않고 있자 주상과 중전은 의뭉스럽게 장 숙원을 바라봤다.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오?”
주상은 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곱슬로도 직모로도 치우치지 않고 부드럽게 윤이 났다.
장 숙원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전하. 중전마마. 이것을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
“...”
“관악산에서 기도할 때에 관악산 산신님이 저에게 삼신 할매가 아기를 점지해 주러 초승달 뜨는 날 인왕산을 넘어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를 지나면 왕의 후사가 이전에 없었듯이 이후에도 없을 거라 하셨습니다.”
중전 신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주상이 대군일 때에 가례를 올린 지가 십 년이 넘어가지만, 아직 아이가 없었다.
“어찌 그 아이가 제 아이겠습니까? 중전마마의 아들입니다”
“아들...”
장 숙원은 기꺼이 아이를 내어놓을 작정인 듯 중전 신씨를 따뜻하게 바라봤다. 그럼에도 중전 신씨는 마음이 다독여지지 않아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 주상이 자신의 편을 들어줬으면 했다. 세자는 누구의 아이도 아닌 주상과 자신의 아이여야만 한다고 말이다. 관상감에서 올린 합방일이 오늘이었다. 주상도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피하실 작정이십니까? 아니면 장 숙원과 첫날 밤을 보내실 겁니까?’
“아들인 것을 네가 어찌 안다는 말이냐?”
주상은 언제나 장 숙원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다.
장 숙원의 영력이 정말 神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술과 계략에서 온 것인지 말이다.
“아들입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