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정적

보내기 싫을 땐 어떻게 붙잡아야 할까.

by 은송하

셋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는 의심과 조롱이 하고 싶어,


누군가는 완벽하게 쓴 가면이 흡족해,


누군가는 자기 연민에 매몰되어 정적이 얼마나 지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저녁 수라를 들여도 되냐는 상궁의 물음에 주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 숙원. 오늘 밤 강녕전으로 들어라. 네 말대로 나에게서 정녕 아들이 나올지 궁금하구나.”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중전도 숙원과 함께 나가보시오. 식사는 혼자 하고 싶으니.”


복도로 나온 중전 신씨가 뒤이어 나온 장 숙원을 불러세웠다.


“...저기. 숙원.”


중전 신씨는 유진과 생김새가 흡사하여 그저 길에서 보았다면 인상이 강한 여자라 쉬이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인상과는 다르게 닥친 어려움을 쉽게 털고 일어서지를 못했다. 첫 아이를 태중에서 잃은 것도, 주상의 마음 한 자락을 얻지 못한 것도, 친정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동생의 연이은 불행도. 다 못난 제 탓인 것만 같았다.


“네, 중전마마.”


장 숙원은 중전 신씨의 반응이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옅게 미소지었다. 별거 아닌 훈수를 두며 저보다 윗전인 것을 확인하기나 하겠지.


“그게 말이오. 정말 원자 아기씨겠소? 참으로 내가 그 아이를 키워도 되겠소?”


“네 마마. 당연한 것을요.”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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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전 신씨는 천천히 장 숙원에게 다가가 귀엣말했다.


“전하는 합궁할 때 말이 많은 걸 싫어하십니다.”


장 숙원은 합궁할 때 무슨 말이 필요하겠냐고 대꾸하려다 말았다. 중전이 주상과 보낸 밤의 날 수가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을 장 숙원이 모를 일 없었다.


“네. 중전마마. 자중하겠습니다.”


“장 숙원. 전하를 잘 보필해주세요. 제가 숙원보기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게 인력으로 되는 일이었던가요? 자책하지 마시어요.”


“고맙네.”


장 숙원은 잠시 서서 중전 신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 자식을 뻐꾸기 둥지에서 둘 수는 없지요. 봉황은 봉황의 품에서 커야지요. 그 자리를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기실 겁니다.’





유진은 등롱을 들고 문지기(사령)들과 시시덕대고 있는 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령 나으리. 스무고개 좋아하십니까? 감은 감인데 못 먹는 감이 뭔지 아십니까?”


“못난이 강단아! 못 먹는 감이면 떫은 감 말이냐? 오늘 가지고 온 곶감은 내가 먹은 곶감 중에 최고인디! 스무고개는 자신이 없단 말이지.”


“떫은 감 아닙니다. 한 번 고민이라도 해보셔요. 제가 매일 여기서 기다리던 것입니다.”


그때 문지기가 유진을 보고는 강단이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저기 네가 기다리던 못 먹는 감 오시는구나. 허허.”


그러자 지우는 폴짝폴짝 뛰며 유진을 향해서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하영 아가씨가 유진과 자신을 집으로 들여보내 주겠다고 한 것을 알리고 싶어 신이 났다. 입이 근질근질했다.


“영감님!”


유진은 뒷짐을 지고 미동 없이 지우를 빤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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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이의 얼굴에 지우의 얼굴이 겹쳐지고 붉은 댕기에 고운 색동 한복을 입고 널뛰듯 솟아올랐다. 앵두 같은 입술에 백자 같은 피부. 그 감촉이 아직 손안에 가득했다. 나비가 앉은 듯한 콧잔등에 윤슬같이 빛나는 눈.


‘미친놈. 여인이 어떤 줄 몰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냐?’


유진은 헛기침했다.


지우가 다가왔다. 아니, 강단이가 다가왔다.


“저기 영감님! 왜 이렇게 저를 빤히 보셔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셔요?”


“아니다. 늦었구나. 어서 가자.”


“네 영감님.”


유진은 궁이 멀어지자 지우가 들고 있던 등롱을 뺏어 들었다.


“영감님. 이건 제 일입니다.”


“됐다. 오늘 부윤댁에 다녀오느라 고생했지 않으냐?”


“그렇긴 합니다. 그 고생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무언가 한번 개발을 하는데 드는 재료비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실패에도 비용이 들고 성공이 찾아오기까지의 인고에 드는 저의 땀방울의 가치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작년 늦가을에 가을장마가 와서 올해 목화솜 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그러니 면포 값도 그렇고 아주까리 기름도 말입니다...”


“알았다. 내가 넉넉히 챙겨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영감님이 최고이십니다!”


지우는 엄지를 유진의 얼굴 위로 들이밀며 환하게 웃었다.


“이것은 아빠 손가락이니 뭐 영감님이 든든하고 좋다는 뜻입니다.”


유진은 등롱을 들어 지우의 얼굴에 빛을 비추며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아까는 못 먹는 감이라며 날 놀림거리 삼지 않았더냐? 이제라도 먹고 싶어졌느냐?”


‘어디를 봐서 땅 파고 책만 보며 조용히 지낸다는 건지.’


“우웩!”


“우웩?”


“네. 우웩입니다. 그런 말을 하면 운종가 아씨들이 영감님께 껌벅 넘어가고 그러셨습니까? 개천 아저씨가 도련님 자랑을 원체 많이 하셔서 성실한 선비인가 했더니 아니셨습니다. 공주 자가도 이리 꼬셨습니까? 느끼하게 ‘날 먹고 싶니?’ 이러면서?”


“이 얼굴로 그런 말을 하면 대부분 넘어올 거 같긴 하다만 내가 말한 것은 네가 말하는 그런 상스러운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 것이냐? 아직 어린 것이.”


유진은 등롱을 내려놓고 관복의 소매를 걷었다.


“자, 먹어라! 맛이 어떤지.”


지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사래를 쳤다.


“어머머. 어디 아녀자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십니까? 천것이라 또 함부로 대하시는 겁니까?”


“네 경박한 사고로 말을 곡해해서 듣지 말라 내가 이러는 것이다. 어찌 너하고만 있으면 내 수준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분이 드는지. 쯧쯧. 내가 앞서서 가마.”


지우는 뚱한 표정을 하며 유진의 뒤를 졸렐레 따라갔다.


‘야식으로 우리도 곶감을 먹자 할까?’


유진이 뒤돌아 지우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멀찍이 누군가 눈에 띄었다. 으슥한 골목이 시작되는 곳에 도현이 서 있었다. 그 옆의 목련 나무의 꽃이 이제는 누렇게 변하여 가엽게 하나 둘씩 떨어졌다.


“강단아!”


“어... 소 객주님!”


도현은 유진을 보며 허리를 잔뜩 수그리고 인사했다.


“효원각 소 객주 도현이 좌승지 영감을 뵙겠습니다.”


“강단이를 보러 온 것인가?”


서글서글 웃는 얼굴이 진짜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인가. 유진은 도현이 지우의 앞에 나와 서서 말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지우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유진을 불한당으로 여기는 양 말이다.


“네. 강단이를 나흘 데리고 있겠다 하셨는데 시일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요. 댁에 갔더니 퇴청하시는 데 모시러 갔다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현은 유진의 손에 들려진 등롱을 보았다. 등롱에는 대제학 집안의 표식인 흑두루미 자수가 놓여 있었다.


“강단이 너! 어찌 귀하신 나으리가 등롱을 들고 계신 것이야? 어서 네가 들지 못할까?”


“도현? 그게. 아니 소 객주님. ...영감님. 제가 제 주제를 모르고 영감께서 등롱을 들고 계시도록 하였습니다.”


유진은 얼떨결에 지우에게 등롱을 건네주었다.


“이 아이가 궤변으로 영감의 심기를 어지럽히진 않았는지요? 워낙에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라. 죄송합니다. 제가 집안 단속을 올바로 못 했습니다.”


‘강단이가 네 가솔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유진은 굵은 숨을 내어 쉬었다. 나흘이라는 말을 할 것이 아니라 강단이를 샀어야 했다.


“영특하여 저희 식구들이 추켜세워 주었더니 아이가 버릇이 없습니다. 저희 효원각에서는 술을 빚는 것부터 돈의 출납까지 강단이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어 손실이 큽니다. 강단이가 영감님을 댁에 모셔 드린 뒤에 데리고 가도 되겠는지요?”


지우는 도현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


“영감님. 제가 소 객주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와도 되겠습니까?”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아라.”


“네.”


지우는 도현의 소매를 붙잡고는 도현이 서 있었던 목련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갔다.


“내가 없으면 네가 장부 정리하면 될 것이고 술은 칠복 어멈에게 담그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홍달홍달에 넣는 염소젖 기름은 내가 넉넉히 만들어 두었잖아. 그런데 왜 찾아온 것이야?”


“도련님!”


지우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유진이 들었을까 싶어 주의를 주었다.


“객주께서 걱정하십니다. 혹여 곤란한 일에 얽혔을까 봐 말입니다. 꼭 들르라고 전하셨습니다.”


“곤란한 일 아니고 흥미진진한 일이야. 내가 언젠가 정약용의 흠흠신서(欽欽新書, 조선 시대의 형법을 다룬 서적)를 읽고 사건 조사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었잖아.”


도현은 지우가 어딘가 몰입할 때 보이는 광기 비슷한 것이 눈에 어리는 것을 보고 지우를 데리고 가기엔 글렀다고 생각했다.


“도련님! 지금 무슨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후 진짜... 조용히 말하라니까.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사람 하나 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야.”


“돈 때문에 그러신 거면 저희가 더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좌승지 영감댁 일을 마치고 다시 효원각에 돌아갔을 때 더 줘야 한다 알았지? 더 준다고 약속한 거야?”


“아니요. 좌승지 영감의 일을 지금이라도 그만두시면요.”


“오늘은 안돼 도현아.”


도현이 지우를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아쉽게도 지우는 벌써 유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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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 객주라는 자와는 친분이 깊으냐? 돌아갈 생각이야? 네가 원한다면 지금 가도 좋다.”


아까는 수고했다며 등롱을 자처해 들더니 이제는 차가운 얼굴로 가라니.


지우는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효원각에서 제가 장부 정리까지 하니 혹여 다른 곳에 중요한 정보가 샐까 걱정이 됐나 봅니다. 당장은 돌아가기 힘들다고 전했습니다.”


도현과 친분이 깊다고 하면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도현까지 곤란해질까 싶어 지우는 도현과의 사이를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았다.


“너는 아는 비밀이 많구나. 너에게는 비밀이 없느냐?”


등롱을 잡은 지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작농의 딸로 태어나 보릿고개에는 빌어먹어 살고 추수 때는 빌어먹은 것 갚으며 사는 계집에게 비밀이 생길 겨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여각에서 일하는 못난이 계집애에게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그래?”


“...영감님은 신부님을 미리 볼 생각에 들뜨지 않으셔요?”


지우는 유진을 생각하는 하영의 수줍어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만 더 회복된다면 복사꽃처럼 어여쁠 것이다. 유진이 장가가기 전에 소랑당의 야설 몇 권을 유진에게 쥐여 줄까 생각하며 음흉하게 저 혼자 웃었다.


“상스럽구나. 그저 무사히 혼례를 치르려 신부가 아프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야. 우연이라는 것이 겹치면 말이다. 그 속에는 거미줄과 같이 광명에 비추어야 눈치챌 수 있는 그런 줄들이 얽혀져 있을 확률이 높다. 신부들에게 비슷한 증상이 일어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네 영감님. 무사히 혼례를 치르실 수 있도록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저기 영감님. 잠깐 효원각에 다녀오겠습니다. 정한 기한을 넘기는 것이니 사정을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지 않습니까?”


“언제... 올 것이야?”


“내일 동트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혼례 때까지 휴가를 얻으셨다 하셨지요?”


유진은 지우를 보내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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