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취하면.
유진은 지우와 돌돌 말은 곶감 한 점을 베어 물고 소주을 곁들여 마실 생각이었다. 함께 부윤댁에 들어가 어떻게 어디를 조사할지부터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을 세울 줄 알았다.
“객주만 만나고 바로 올 것이지 어찌 내일 온다고.”
“간 김에 집에도 들르려 합니다. 아버지가 약초를 캐러 가셨는데 다리가 불편한 여동생이 혼자 집에 있습니다. 어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보고 오려 합니다.”
“여동생? 오라비가 아니고?”
이제 유진의 집 앞에 다다른 지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오라비가 있는 줄 어찌 아셨습니까?”
“저번에 네가 네 오라비가 사기를 당했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이다.”
유진은 오늘 사정전에서 부마 간택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누었던 것이 생각나 물었던 것인데 자칫 난감할 뻔하였다.
강백단 어르신은 아버지 준성과 종종 바둑을 두었다. 아버지가 가끔 얘기하시리로 그 집에 아들 둘이 있다고는 했지만 딸이 있다는 얘기는 없었다.
“아. 오라비라 생각하지 않아 종종 잊습니다. 오라비도 있고 여동생도 있습니다. 어서 들어가시어요. 피곤하실 텐데.”
유진이 지우에게 무언가 더 물으려 할 때 쪽문이 열리며 개천이 나왔다.
“도련님. 이제 오십니까?”
“집에는 별거 없고?”
“네.”
개천은 지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유진의 곁에 바짝 다가가 말했다.
“오늘은 대감님의 성균관 제자가 오셔서 같이 바둑을 두셨습니다. 늘 오시던 분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래? 지금도 계시고?”
“아니요.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유진은 뒤돌아 지우를 바라봤다.
“그럼 저는 다녀오겠습니다.”
지우는 등롱을 개천에게 전해주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눈이 좋은지 머뭇거리는 거 하나 없이 잽싸게 가버렸다.
“빨리도 가는구나.”
유진이 아쉬운 듯 말하자 개천은 의뭉스럽게 유진에게 물었다.
“도련님은 저 아이가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영특한 아이라 쓸모가 있어서 그런다.”
“네~. 영특해서 그렇게 빤~히 뒷모습을 보시는군요?”
개천은 모시던 주인에게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면모인지라 자꾸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구나.”
“죄송합니다.”
유진이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집이 오늘따라 썰렁해 보였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했던가. 귓가에 지우의 해사한 웃음소리가 밤 공기를 타고 들리는 듯했다. 두툼한 눈두덩이에 반쯤 감긴 게슴츠레한 눈으로 제 아비가 주고 갔다던 마방진을 풀며 웅얼대던 찰진 욕지거리.
“아실이 쪽은 어때? 월도각에 자주 가던가?”
“네. 강단이가 저희 집에 오고 나서 저희 마누라와 저를 자주 찾고 이것저것 묻습니다. 조심해서 움직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효원각에서 매출이 높아진 것이 강단이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 아이가 저희 집에 있으니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겠지요.”
“자네가 수고가 많군.”
“수고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저희 형제를 추노꾼들에게서 구해 주신 것도 모라자 은덕을 베푸셨는데 이만한 일로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요. 노비 문서를 없애주시고 저는 이렇게 도련님을 동생은 주상 전하 곁을 보필하니 저희 집안의 은인이십니다.”
“자네 형제가 천성이 선하고 일을 노련하게 잘 처리해서일세. 나에게 그리 고마워할 필요 없어.”
“하여튼 도련님도 참.”
“월도각 성 객주가 참 대단해. 사대문 안에 있는 내놓으라 하는 집안 중에 월도각 출신의 첩이나 집사가 없는 집이 없다니 말이야. 양반네 가풍과 주인을 대하는 태도에 집안 살림을 운영하는 법까지 체계적으로 익히게 한다고 들었어. 영악한 것이 그 집안의 특기인가 보군. 그렇게 보낸 첩이나 하인들은 정보를 물어다 줄테니 말이야.”
“성 객주가 장 숙원 마마의 숙부니 월도각에서 온 첩이나 하인을 인간 부적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저희 대감마님도 월도각에서 아실이를 데리고 오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의 불안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네. 의심 없이 사람을 들이니 말이야.”
개천은 유진도 강단이를 의심 없이 들인 게 아닙니까 하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저는 씻을 물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먼저 차를 준비해 주게나.”
“오시면 곶감과 술을 드시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됐어. 술친구 없이 먹는 술은 속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어간다네. 마음이 취하면 판단이 흐려지기 십상이지.”
유진은 마루에 앉아 관모를 옆에 벗어 두고 서쪽 하늘로 기울어져 가는 초승달을 보았다. 달이 빨리 지니 밤이 제법 길게 느껴질 듯했다.
*
지우가 효원각으로 들어서자 칠복 어멈이 달려와 지우를 반겼다.
“강단아! 너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거니? 네가 없어 내가 술 빚는 데 식겁을 했다. 내일부터 쭉 나오는 거지?”
지우는 도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소 객주 안 오셨어요?”
도현은 기다리기로 한 목련 나무 아래에 없었다.
“역시나 너, 소 객주를 마음에 품은 게지?”
“제 주제에 무슨 남자입니까? 저는 시장통의 삼월이 할매가 저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삼월이 할매는 오늘도 진하게 분칠하고 엉덩이 흔들고 다니더라.”
시장에 떡 파는 삼월이 할매는 꾸미기를 좋아하고 혼례를 치르지 않은 할매였다. 올해 환갑인데 활기차기가 새색시 못지않았다. 관아에서 처녀들 혼례를 막는 나쁜 본보기라고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못 올 거 같아요. 좌승지 영감댁 혼례 준비하시는데 돕고 있어서요.”
혼례라. 그러고 보니 지우는 아버지가 말한 장가를 언제 가고, 처자는 어느 댁 처자인지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유진과 하영의 집을 오고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은 아주머니가 당분간 수고 좀 해주세요. 좌승지댁 혼례가 끝나면 바로 올 거예요.”
“어쩔 수 없지 뭐. 참! 오랜만에 진상이 왔더라. 그 있잖아. 백단 어르신네 첫째. 둘째는 점잖고 곱상하던데 첫째는 왜 그 모양인가 몰라,”
“그러게요. 하. 하.”
“그 인간은 왜 술만 쳐먹으면 네 앞으로 술값을 달아놓는 것이냐? 혹시 너 진상이 첩실로 들어가려고 그런 거면 아서라~! 그 집안에서 세자가 죽고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산다더라.”
“아주머니! 재수 없는 소리 마세요. 제가 그 진상의 첩실로 들어갈 일도 없거니와 제 동무가 그런다고 해도 한강에 가 코 박으면서 말릴 겁니다. 그냥 뭐 제가 꼬투리 잡힌 게 있어 그래요.”
백단은 지우가 효원각에 가서 설향의 장사를 돕는 줄은 알았지만, 계집종 행세를 하는 것은 전혀 몰랐다. 여인의 옷을 입고 손님들 시중을 든 걸 알았다면 네 어미의 바람을 잊은 것이냐며 큰 소리가 담장 밖을 넘어가고 회초리를 들어 집 밖을 못 나가게 할 게 뻔했다.
성우은 어느 날 동무들을 데리고 효원각에 술을 마시러 왔다가 도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강단이를 보고 단박에 지우인 것을 눈치챘었다. 제 동생은 그러고도 남을 아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무슨 꼬투리?”
칠복 어멈은 눈이 사시가 돼서는 능글맞게 웃었다.
“칠복 어멈에게까지 꼬투리 잡히고 싶지는 않네요. 진상은 어느 방에 있습니까?”
“귀목(龜木, 느티나무)방에 있어. 뻔하지 뭐. 돈도 없으면서 비싼 술을 꺼내오라고 소 객주를 조르고 있겠지. 그나마 다행인 게 오늘은 혼자더라.”
“네.”
지우가 귀목방 앞으로 가자 성우의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렸다. 도현을 옆에 두고 진탕 술을 마시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현아. 넌 어쩜 이렇게 곱니? 사내들도 네가 탐나서 여기를 자주 오지 않아?”
“도련님. 많이 취하셨습니다.”
“우리 지우하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
“천부당만부당 제가 어찌 그런 마음을 품겠습니까?”
“에이. 이 형님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돼. 야! 사실 말이야. 우리 지우는 계집도 사내도 아니잖아. 걔가 장가를 간다니 말이 돼?”
“네? 그게 무슨.”
“그게 말이야.”
지우는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누가 들을까 봐 입만 벙긋거렸지만, 성우은 지우의 얼굴을 보고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야~! 헛소리 작작하고 어서 집에나 가!”
“우리 지우... 쉿! 여기서는 강단이지? 우리 강단이 왔어? 우리 고운 남동생. 형아 빚 갚느라고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이 많지?”
성우는 생김새가 아비를 많이 닮았다. 각진 얼굴형에 백발인 아비를 따라 서른 전인데도 흰 머리가 듬성듬성 확연히 보였다. 두드러진 광대에는 어디 시정잡배에게 먼저 얻어맞았는지 멍이 시퍼렇게 들어있었다.
“그걸 아는 인간이 여기서 술을 마시고 있어? 그것도 내 앞으로 술값을 달아 놔? 너는 이제 오라비가 아니라 오라질이야 오라질. 오늘 좀 맞자. 응?”
지우는 옆에 세워져 있던 가야금을 집어 들고 성우에게 휘둘렀다.
“성균관에서는 널 안 내쫓고 왜 아직도 데리고 있는 거니? 성균관도 옛말이다 라는 말이 잘못된 말이 아니구나?”
성우은 혀를 날름거리며 지우가 휘두르는 가야금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누군가 뒷목을 후려쳐 햇볕 쨍쨍한 날 인도로 나온 지렁이처럼 꿈틀대다 바닥에 쓰러졌다.
“객주!”
“도련님이 술이 과하신 듯하여 잠을 좀 재웠습니다.”
설향은 지우를 보며 싱긋 웃었다.
설향은 사헌부(司憲府, 감사원) 정5품 지평(持平)이었던 지우의 할아버지에게 하사된 호위무사였다. 지우네 집에 머물다가 지우의 아버지 백단과는 친구이자 지우의 죽은 엄마와는 둘도 없는 자매 같은 사이가 되었다.
지우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시장에 주막을 차려 오늘의 효원각에 이르게 되었다.
“성우 도련님이 어릴 때는 한양에서 더는 이만한 인재가 나오기 힘들 거라고 들으실 만큼 영민하셨는데 5년 전 그 일이 있고부터는 마음을 못 잡으시네요.”
설향은 알고 있었다. 이리 말하면 지우의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라는 걸 말이다. 지우는 가야금을 내려놓고 멋쩍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래서 내가 많이 봐주고 있지 않습니까? 해달라는 거 은근히 다 해주면서요.”
“도련님이 성우 도련님을 많이 봐주고 계신 것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오늘 술값은 이달 보름 동안 일했던 것을 정산한 것에서 빼면 되겠지요?”
“객주! 아니 그 돈 빼고 빚 갚고 나면 나하고 끝명이는 뭐 먹고 삽니까?”
지우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거 같은 눈으로 말했다. 억지 눈물을 짜내려고 눈을 한 번도 깜빡이지 않고 부릅떴다.
“도련님. 저는 땅 파먹고 삽니까? 친해서 봐주고 젖 먹였다고 봐주고. 저도 제 밑에 챙겨야 할 식솔이 한둘이 아닌 거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성우 오라비를 봐주는 만큼 객주도 좀 나를 봐주시오. 객주는 나에게 엄마와 같지 않소.”
지우는 설향에게 안겨서는 엉덩이를 쭉 빼고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아양을 떨었다. 설향이 지우를 알고 있는 만큼 지우도 설향을 알고 있었다. ‘엄마’라는 말이면 마음이 기운다는 걸 말이다.
설향은 오늘도 못 이긴 척하고 싶은지 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