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시선이 머물던 그 손.
“내가 도련님 젖동냥만 해주지 않았어도 이리 손해를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7할만 내시어요.”
“고맙네. 고마워. 역시 객주는 예쁜 얼굴만큼 마음도 고와~. 고운 만큼 반으로 깎아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이리 쭈글쭈글한데 무슨 말씀을. 하여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잘도 하십니다.”
도현은 싱그시 웃으며 말을 주고받는 설향과 지우를 바라봤다. 익숙하고 여전한 이 장면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했다. 행복하다.
설향은 제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잡아 올리며 말했다.
“도련님이 좌승지 댁에 가 계신 동안 장부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긴히 드릴 말씀도 있습니다.”
“객주 방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눌까요?”
“그리하시지요. 도현이는 성우 도련님을 성균관으로 모셔 드리고.”
“네. 어머니. 저기 도련님. 아까는 길에서 성우 도련님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왔습니다. 이미 취하셔서.”
지우는 다 이해한다는 표시를 했다. 설향과 지우는 효원각 제일 뒤편에 있는 아담한 기와집으로 향했다.
초승달이 이제 막 서쪽으로 넘어가기 직전, 날카롭기 이를 데 없이 노란 서슬이 빛나고 새순이 돋은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들이 작은 연못 위에서 흐느적 춤사위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으스스한 기분인데!”
지우가 한기가 드는지 몸을 감싸 안자 설향은 걸치고 왔던 망토를 벗어 지우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아직 봄밤의 바람이 찹니다.”
“객주도 추울 텐데. 저는 괜찮습니다.”
“몸살도 났었다면서요. 덮어요.”
설향의 다정한 손길에 지우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엄마가 있어 본 기억은 없지만, 설향이 자신에게 보이는 친절 같은 게 엄마가 있는 느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객주! 우리 아버지와 살면 안 돼요? 진짜 엄마하면 좋을 텐데.”
지우는 이 말이 왜 이렇게 떨리고 수줍은지 몰라 설향이 덮어 준 망토를 안아 여몄다.
“안됩니다. 어르신이 양반이라던가, 그분의 높은 뜻을 받들기에는 쇤네가 부족하다던가 이런 게 아니라 어르신이 사내로서 저에게 전혀 여지가 없으십니다.”
“이해해요.”
지우는 밥을 먹을 때 한쪽 엉덩이를 살짝 들어 방귀를 뀌는 제 아비를 생각하니 설향에게 재차 권하기가 미안해졌다.
“남들 가진 건 다 갖고 싶은 게 사람이지요. 엄마가 있어 괴로운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대신에 저와 도현이 지우 도련님께 가족이나 마찬가지니 없는 것에 마음 쓰지 마셔요.”
“네.”
“돌아가신 마님이 원망스럽지는 않습니까? 고운 아씨가 사내로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성우 형님 밑으로 딸이 둘이나 돌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저를 살리려고 그렇게 하셨답니다. 저는 이걸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관악산 절 스님이 그러셨다지요? 저를 아들처럼 키우면 아이는 살겠지만, 어미가 죽을 거라고요. 저를 낳고 대문에 고추를 걸자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었습니다.”
설향은 옛일들이 눈에 밟히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아버지가 무슨 전설처럼 읊어댄 말이지만 아내와 딸들을 잃었으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남에게는 그딴 걸 믿느냐 했겠지만 자신의 일에는 총명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람이니까요. 사내로 키워졌기에 산학도 배우고 땅도 파며 살길을 도모하기 쉬웠던 것도 있지요.”
“도련님은 이리 마음이 깊은데 백단 어르신은 참. 어서 가십시다. 달이 넘어가겠습니다.”
“네.”
지우는 쓰게 웃으며 설향의 뒤를 종종 따라 걸어갔다. 집으로 들어서자 설향이 좋아하는 달항아리들이 자개장 위에 앙증맞게 놓여 있고 마루 한가운데는 얼마 전 옻칠한 탁자와 의자 넷이 덩그러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향은 호롱불에 불을 붙이고 서랍에서 장부과 주판를 꺼내 지우에게 내밀고는 어제 들어온 수입에서 오늘 지출된 식재료 비용을 빼달라 얘기했다.
“도현이도 잘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저에게 시키시는 건 왜입니까? 저에게 조금 더 챙겨주시려는 배려이시지요?”
설향은 손을 턱에 괴고는 서향을 향해 있는 창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장부가 돈의 드나듦만 잘 기재해서 된 답니까? 돈과 시류의 흐름을 보아야지요. 도련님이 보시기에 오늘 지출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까?”
“제가 안 나왔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누룩의 가격이 왜 이렇게 올랐습니까? 은국전(銀麯廛, 누룩을 파는 상점)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설향은 눈썹만 까닥하고 별말이 없었다.
“누룩 가격이 이러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요거타, 백설향, 향온주, 소주의 가격을 올려야 하지 않나요? ...술 가격을 올리지 않을 거라면, 재룟값이 낮은 안주를 만들어 팔든가요.”
지우는 주판의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주르르 그었다. 설향이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내리 말했다.
“작년에 쌀농사 밀 농사 다 풍년이었지 않소? 이렇게 누룩값이 오를 리가 없는데.”
“도현이는 통찰력과 인내심이 부족해 도련님만큼 생각하지 못해서 걱정입니다. 허영이 있어 예쁜 걸 갖고 싶다고 생각하면 당장 가져야 직성이 풀리고요.”
“손해 보지는 않을 성격이니 걱정하지 마셔요.”
설향은 빙긋 웃었다.
작년 종묘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社稷祭,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국가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올리는 제사.)가 있었다.
장 숙원이 제문을 읽자 땅에서 꽃향기가 일어났다고 했었다. 작년은 근 몇 해를 통틀어 가장 풍작이었다.
“작년에는 풍작이었지만 올해는 작년의 반에 못 미칠 거라고 장 숙원 마마가 선견(先見)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쌀을 국고에 쌓기 위해 팔도의 곳간에서 한양으로 쌀을 옮겨오고 있습니다.”
“장 숙원 마마의 선견(先見)이 맞아 흉년이 든다 해도 한번 국고에 들어간 쌀이 백성에게까지 올 수 있을까요?”
“걱정입니다. 처음에는 백성을 위하는 척. 나라의 불운을 막는 척하다가 제 이익을 챙길까 봐서요. 이전에도 그런 도적들을 많이 보았지요.”
설향의 눈에 독기가 어렸다.
“그렇다고 저희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요. 방도를 찾아볼 수밖에. 도련님이 이번에도 맡아서 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객주~! 좌승지께서 영감의 혼롓날까지 부윤댁 따님을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저는 끝명이에게 가보겠습니다.”
지우는 망토를 벗어 설향에게 건네었다.
“술이나 빚자고 도련님을 붙잡고 있는 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즉시 발을 빼셔야 합니다. 아셨지요? 공주가 영감과 신부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말입니다.”
“위험한 일이 생길 게 뭐가 있겠어? 그저 영감이 재수가 없는 것이지.”
지우는 설향을 안심시키려 유진을 깎아내렸다.
설향은 지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설향의 손바닥이 까끌했다. 아직도 검을 연습하는 듯했다.
“더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의아하게 보는 지우를 향해 설향은 어찌 말을 꺼내야 하나 싶어 입맛을 다셨다.
“저기. 도련님.”
“네. 말씀하십시오. 대신 짧게 부탁드립니다. 인정(人定, 밤 10시)이 다 되어갑니다.”
설향은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더니 지우의 눈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백단 어르신이 덕유산에 왜 가셨을까요?”
“그야 덕유산에 사시는 아버님 친구께서 약초밭을 크게 하시니 약초를 얻으러 가셨지요. 말린 약재를 한가득 가지고 와 객주에게 팔 거라고 신나게 떠나셨습니다. 물론 취나물이나 잔뜩 뜯어오겠지만요. 오는 길에 받은 건 다 팔아 술 마시고 산해진미 다 먹고 올 게 분명합니다.”
“신나게요?”
“네. 신나게요. 끝명이 말로는 그러했습니다.”
“도련님. 장가보낼 거라는 말씀을 하신 뒤였지요?”
지우는 부끄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객주는 알고 있었군요. 어이가 없어서. 오늘내일하는 처자가 있는데 처녀 귀신 만들지 않으려 저를 들인다더군요. 성우 오라버니가 어디 말단이라도 관직을 얻을 요량으로 아버지가 그렇게 하시기로 하신 거 같아요. 신부가 죽더라도 저를 내치지 않을 거라고.”
“어느 댁 아씨인 줄 들었습니까?”
“뭐. 뻔하지요. 궁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소란당이라는 책방이 있습니다. 거기에 달포에 두어 번은 가는데 과천 현감의 여식이 저를 거기에서 보고 반했더랬지요. 그런데 그 아씨가 어릴 때부터 소변에서 단내가 나는 소갈증(당뇨)에 걸려 요즘 눈도 침침하고 몸도 아프다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 집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설향은 지우의 손을 더욱 꼭 잡더니 그윽하게 지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공주 자가께 장가드시는 겁니다. 부마로!”
지우는 믿기지 않아 멍하니 설향을 바라보다가 통금을 알리는 종이 울려서야 입이 트였다.
“허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예요? 부마라니요? 객주! 농이 지나쳐 어찌 받아쳐야 할지 모르겠소.”
장 숙원이 강녕전의 주상의 침소로 들어서자 주상은 이미 금침 앞에 주안상을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눈이 풀린 걸 보니 술을 마신 지는 시간이 꽤 된 것 같았다.
숙원이 가까이 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흔들리는 호롱 불빛에 손을 기웃거리며 모양이 바뀌는 그림자가 재밌는지 실실 웃기까지 했다. 속적삼에 잠방이만 걸쳐 입고 아이 같이 천진하게 웃고 있는 주상의 모습을 보자 장 숙원은 어서 달려가 머리를 쓰다듬고 제 가슴에 품고 싶었다.
“전하.”
장 숙원은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궁에서 처음 만난 세자 휘랑은 따뜻하나 자주 음울에 빠졌고, 정효 공주 은우는 오만방자했지만 맞춰만 주면 누구보다 다루기 쉬웠다.
광렬 대군이었던, 지금의 주상인 휘우는 말수가 적었다. 장 숙원은 주상이 자신에게 처음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신기(神技)가 있다고 그 입 함부로 놀렸다가는 내가 네년을 살려두지 않을 테니 명심하거라.”
그때부터였다. 주상을 갖고 싶다고, 왕에 앉힌 뒤에 제일 나중에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말이다.
“전하.”
장 숙원이 두 번을 부르자 주상은 돌아보았다. 사르르 사내를 녹이는 눈에 분홍빛 입술, 백옥 같은 피부에 꽁꽁 싸매어도 느껴지는 풍만한 가슴. 시방 달려가 치마를 들추어 내 걸로 만든다고 하여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관계인데도 주상은 가만히 장 숙원을 바라봤다.
주상은 장 숙원을 향해 손짓하며 옆으로 오라 일렀다. 장 숙원은 주상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물고 술잔을 든 주상의 손을 보았다.
중전 신씨의 시선이 늘 머무르던 그 손.
“그 잔을 다 비우시면 제가 채우리까?”
"옷을 벗고 눕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