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서지 않았다.
주상 또한 술주전자를 잡은 장 숙원의 손을 보았다. 삼상(森祥)을 주무르고 있는 저 손이 갖고 싶다.
“전하. 그래도 전하와 처음이온데.”
장 숙원은 짐짓 아무것도 몰라 모든 걸 처음부터 배워 나가야 하는 초야의 여인처럼 수줍게 눈을 내렸다. 주상이 천천히 비녀를 하나씩 뽑고 옷고름을 풀어주기를, 제 고운 어깨선에서부터 입 맞추어 주기를 몇십 번, 몇백 번이고 상상했었다.
“삼신 할매를 들먹이기 전에 네가 서찰로 강지우를 부마로 들이는 것을 돕겠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은 나와 합궁하기로 작정한 게 아니냐? 내 비위를 맞추려 부단히도 애썼는데 나도 보답을 해야겠지? 원한다면 내가 벗겨주고.”
‘잡히지 않으려고, 휘둘리지 않으려고 날을 세우는 전하께 왜 이렇게 마음이 기운단 말입니까?’
장 숙원은 주상의 싸늘한 말이 좋아, 그 비아냥에 대한 반감이 오히려 연모가 되어 마음에 깊이 담았으면서도 오늘 밤은 왠지 서운했다.
도현의 다정한 말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도현과의 밤이 좋아 주상과의 밤도 기대한 탓이었다. 다정을 맛보면 심(心)이 약해지는구나 하고 생각한 장 숙원은 도현과의 관계를 끊어야겠다 하고 다짐했다.
후일을 위함이다. 주상에 대한 정복은 남편의 다정만 바라는 어느 여염집 여인과는 다른 것이기에. 언젠가 주상에 대한 연모 또한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장 숙원은 주상의 잔을 채웠다.
“저는 사주를 풀어 그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제 진심을 모르십니다. 마음을 길어 전하께 보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얼마나 전하를 연모하는지, 이날이 허락되어 얼마나 기쁜지 말입니다. 이 궁에 들어온 날부터 이때까지 전하가 아닌 어느 것도 저에게 감흥이 없었나이다.”
장 숙원은 떨리는 손으로 제 머리 중앙의 첩지를 뽑아 옆에 두고 뒤꽂이를 하나하나 뽑아내었다. 봉황 은비녀를 뽑을 때쯤 주상이 몸을 돌려 장 숙원의 손목을 잡았다.
“형님의 마음을 네가 난도질하는구나. 형님이 살아 계셨을 때 널 아낀 것을 내가 알거늘. 어린 너를 품는 것이 죄스럽다며 기다린 형님이셨다.”
장 숙원은 제 손목을 잡은 주상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아들을 낳을 거라는 네 말이 정녕 사실이어야 할 것이다. 나의 중전에게 함부로 했다가는 너나 네 아들은 이 조선에서 발붙일 곳이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 전하에게 나의 중전이셨습니까? 그런데도 중전마마에게 그리 쌀쌀맞으셨단 말입니까?”
장 숙원은 차오르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찰랑거리는 눈물 앞에 흔들리는 주상의 모습이라도 잡고 싶어 팔을 들었다.
“내가 그것까지 네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너는 그저 하루다. 중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박한 계집일 뿐이야.”
‘경박한..’
도현은 경박해서 좋다고 했었다. 방탕하고 음탕해서 좋다고 했었다.
“왕실을 능멸한 천한 것. 선왕과 대비를 더 악하게 만든 원흉. 네가 아니었다면 선왕이 돌아가셨을 때 백성들이 흥에 겨워 덩실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에 세금을 매긴 왕이라니.”
장 숙원은 주상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제 옷고름을 스스로 풀었다.
‘주상. 주상도 좋아하게 될 겁니다. 나의 습지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겁니다.’
장 숙원은 주상의 목덜미를 잡고 힘껏 끌어당겨 주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주상이 입 안에 머금은 술이 장 숙원의 입안에 감돌고 향긋한 과일향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주상의 털들이 제 입가를 슬금 간지럽히자 금세 아랫배가 둥둥거렸다.
주상은 장 숙원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관악산 신당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네 영력이 그리 대단하다면 해보아라. 내 씨가 없이도 아들을 낳는 것. 네가 아들만 낳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뒤처리를 깔끔해야 할 것이다. 나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말이다.”
장 숙원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제발 이대로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주상은 장 숙원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일 아침에 나가거라. 그래야 태후께 예쁨을 받지.”
주상은 언제 취했었냐는 듯 일어나 처소를 나갔다. 걸음마다 느껴지는 위엄에 장 숙원은 볼을 사르르 떨었다. 그제야 강녕전 주변이 이상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환관들과 금위병들이 보이지를 않았으니 말이다.
모두가 지켜보는 잠자리가 싫었을까 했었다. 주상 또한 저와의 밤을 기대했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저를 철저히 혼자 머물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가 모를 줄 아십니까? 주상께서 자손을 보실 수 없는 몸인 걸 말입니다. 누구의 비밀이 더 센지 궁금했었는데 주상께서는 벌써 지셨습니다. 제 몸에 손도 대지 못하셨으니 말입니다.’
지우는 통금인데도 집에 가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둑한 거리에 작은 제 몸을 숨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끝명이가 우물가에서 공을 들여 빤 하얀 도포를 잔뜩 오므렸다.
달까지 몸을 숨긴 칠흑 아래 길가의 노란 민들레만 옅은 빛을 내고 있었다. 끝명이가 보고 싶기도 했고 머리가 너무 복잡해 집에 가는 것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부마? 정효 공주의 지아비가 된다고? 그 무서운 여자에게 내가 여자라는 걸 들켰다가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여 내 오장육부까지 남아나질 않을 것이다. 혼례가 하지라 하였다. 이제 두 달 남짓 남은 것인데. 좌승지 영감이 무사히 혼례를 치르는 것만 보고 끝명이 하고 도망가자. 덕유산 자락 어디 숨어서 아버지 친구 분을 따라 약초를 캐며 살면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공주가 죽으면 나를 찾는 것도 멈출 것이다. 망할 아버지, 지랄 맞은 오라비. 다 싫다!’
지우는 끝내 눈물이 났다. 순찰을 도는 나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몸을 숨길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옛집 앞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 앞으로 온 것을 알자 지우는 북받치는 감정을 삼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속절없이 흩날리는 하얀 배꽃이 지우를 위로하는 듯 지우의 짚신을 감싸며 흩날렸다.
유진을 업고 이 집으로 온 것이 불과 며칠 되지 않은 것이 새삼스러웠다. 이럴 때 왜 그의 품이 따뜻했다고, 다시 기대어 이 밤에 쉬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우는 며칠 동안 그에게 정이 많이 들어 그러나 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다.
대문 밖에서 포졸들이 누군가 이 폐가 안으로 들어갔으니 살펴보자는 말소리가 들렸다. 누가 먼저 들어갈까 하고 서로에게 미루면서도 이참에 안에 사람이 있다 없다로 내기를 걸어 무료함을 달래는 듯했다.
지우는 서둘러 마루에 올라 방으로 들어섰다.
“웬 놈이냐?”
낮고도 웅장한 목소리의 사내는 도검(刀劍)을 지우의 목에 겨누며 이미 익숙해진 어둠 속에서 상대의 정체를 알아내려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영감님?’
지우는 강단이 아니라 지우라면 유진의 품에 안겨서 눈물을 쏟아도 될 것 같았다. 강단이는 못했지만 지우라면 다분히 그렇게 해도 될 것 같았다.
이 집은 강지우의 옛집이고 이미 그의 품에서 눈물을 잔뜩 쏟은 전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형님. 저입니다. 강지우.”
“네가 어찌.”
그때 밖에서 나졸 둘이 들어와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인데 자기들이 들어와 살까 하고 시답잖은 농을 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거기 누가 있소?”
“있으면 대답을 하겠어? 참나.”
“놀라서 나올 수도 있지! 이번 달에는 걸리는 놈이 없어 내 호주머니에 엽전 소리 난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한 놈 잡아서 몇 푼 얻어내지 못하면 오늘 마누라한테 쫓겨날지도 몰라.”
“거짓말은. 월도각 춘영이 영도 손목 한 법 잡겠다고 돈 모으고 있는 걸 내 모를 줄 알고?”
“잘못 짚었다. 효원각이다!”
“효원각 술상 때문이었어? 거기는 아낙들이 좋아하는 곳이거늘. 남사스러워 난 엄두도 안 나더구먼.”
“나는 질보다 양이여. 어차피 춘영이 영도는 나 같은 거까지 순서도 못 오니 효원각에 가서 꽃다운 북촌 아가씨들이나 구경할란다.”
“그나저나 으스스한데.”
마루 디딤돌까지 올라와 나졸들이 이리저리 살피자 유진은 지우를 벽에 밀어붙여 안으로 두고 자신도 벽에 바짝 붙었다.
날숨 한 번에도 서로의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여러 번 들썩였다. 언제 숨을 들이마시고 뱉어야 자연스러울지 몰라 서로의 숨결에 귀 기울이다 점점 더 가까워졌다.
야옹~.
윤기 나는 검은 털에 노란 눈이 빛나는 고양이가 마루 아래에서 튀어나오자 나졸 둘이 걸음아 나 살아라~ 하고 대문으로 달려나갔다.
“이제 나갔나 보군.”
유진은 이 집에 있는 자신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여전히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도검(刀劍)을 언제 칼집에 넣나 보다 지우를 꼭 안고 싶은 마음을 견디느라 온몸에 힘을 빼지 못했다.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어찌 갓을 쓰지 않은 게야?”
“어딘가 두고 깜빡했나 봅니다. 저기. 저기 말입니다.”
“...어! 미안하구나. 마음이 급해 너무 붙어 있었구나.”
유진이 뒤로 물러나려 하자 지우는 유진에게 폭 안겨서는 소란당에서처럼 유진의 명치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렸다. 유진은 지우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지우를 감싸 안았다.
“왜 또 우는 것이야? 아직 그 여인을 ...잊지 못하여 그러느냐?”
“...”
“여기는 어떻게.”
‘아. 여기가 네 집이었겠구나.’
지우가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장가가기 싫습니다.”
“...”
“아버지가 저 몰래 혼담을 넣어 궁에 들어가게 생겼습니다. 부마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간택될까 너무 두렵습니다.”
“...나도 안다. 내가 좌승지인 것을 잊었느냐?”
지우는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 위에서부터 서서히 유진의 얼굴이 내려와 제 입술에 몰캉한 것이 와닿았다. 지우의 머릿속에 유진의 도톰한, 동백꽃 몽오리 같은 입술이 둥실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