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 여인이기에 상것이기에.
‘어둠 속에 둘이 있었고 너무 가까웠다. 내가 울면서 안았다. 그래서. 그래서 영감님이 잠시 판단이 흐려지신 것이다. 사내는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욕정이 일어날 수 있다고들 하니. 그러니. 마음없이.’
“영감님!”
지우가 뒷걸음질하며 말했다.
"위로가 과하십니다."
“놀라니 이제야 네 음성이구나. 강단아! 아니 강지우?”
“...어떻게. 어찌.”
“겁도 없이 처음 만난 남자의 가슴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잠들지 말았어야지. 겁도 없이 사내의 가슴에 안겨 울고, 함께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지.”
“...”
“얼굴만 다를 뿐 다 같았다. 향기, 체형, 네 발목의 붉은 점까지.”
“...”
“왜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것이냐? 여인일 때는 왜 얼굴을 바꾸었고?”
지우는 유진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구멍이 숭숭 난 문에서는 꽃바람이 들어왔다. 부마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남장을 하고 다녔던 것을 알면서 입을 맞추건 무슨 뜻일까?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너와 두 번째 밤을 보낸 날.”
“말씀을 묘하게 하십니다. 저과 밤 동무를 한 것처럼 말씀하시다니요? ...저에게 입을 맞추신 것은 경솔하셨습니다.”
“...”
‘좀 전의 입맞춤은 연정이 아니라 꽃바람 때문이었다. 불쌍한 것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지우는 짧은 숨을 뱉고는 말을 이었다.
“제 위에 언니가 둘이 있었는데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저를 가지고 딸이면 또 죽을까 걱정해 절에 가 치성을 드렸는데 어떤 스님이 아들로 키우면 오래 살 것이라고 했답니다. 자식을 잃지 않으려던 부모의 신념 같은 거였습니다.”
유진은 지우의 곁에 앉아 가만히 들었다.
“어머님은 저를 낳고는 돌아가셨습니다. 오라버니 말로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아버지하고 금실이 좋으셨고 어진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오라비가 그리 저를 미워하나 봅니다.”
지우는 서러움이 밀려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어째 이 사내 앞에서는 이리도 울게 된단 말인가?
“혹여 여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란 말이지?”
“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신유진이라는 종이 네가 사모하는 여인을 데리고 도망갔다고 말이다. 혹시 공주를 일찍부터 마음에 품은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남장을 하고 다니니 스스로는 사내라 여겨 여인을 마음에 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독살 당하실 뻔한 걸 잊으셨습니까? 그리 무서운 여자는 동무로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 소란당에서는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영감님을 만난 뒤로 재수가 없어서.”
“정말 재수가 없다고 여기느냐?”
유진은 돌아앉아 지우의 손을 잡았다. 입맞춤으로 제 마음을 보였으니, 이왕 의심을 샀으니, 지우의 마음이 궁금했다. 모두가 널 미워하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우는 손을 뿌리치며 물었다.
“여기는 왜 오신 겁니까?”
“...네가 여기를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 나는 네가.”
지우는 그 뒤의 말을 더 들었다가는 제 심장이 솜 방망이질이 아니라 다듬이질이 될 듯싶어 유진의 말을 끊었다.
“혼례를 앞둔 분이. 신부님을 살리려 하신 분이 이러시는 건 법도에 어긋납니다. 가당치 않습니다.”
지우가 일어나 엉덩이를 털며 나가려 하자 유진은 지우의 팔을 잡았다.
“네가 부마가 되는 걸 막아주마.”
“간택이 안 될지도 모릅니다. 저 같은 걸 누가 남편으로 삼고 싶겠습니까? 기적적으로 된다고 해도 저는 스스로 살길을 찾겠습니다.”
“...”
“...저는 꼭 하영 아씨가 영감님의 신부가 되게 할 겁니다. 영감님께서 밤 동무를 찾으시는 것이면 제가 아니라 월도각으로 찾아가셔요. 영감님의 밤 동무가 되려는 기녀들이 줄을 서고 잘 배운 기녀들이 영감님의 첩실이 되려 갖은 아양을 떨 거니 말입니다.”
유진은 잡았던 지우의 팔을 놓았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지우와의 세 번째 밤을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어둠 속에서만큼은 사내와 여인으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부윤댁과의 혼례를 깰 수 있단 말인가.
지우가 부마로 간택이라도 된다면 정말 엎을 수 있을까?
장 숙원이 주상의 편을 들었다. 지우가 부마가 되는 걸 정녕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유진은 앞뒤 재지 않고 지우에게 나아간 걸 지우의 말대로 경솔이라 해야 할지 진심을 전한 것이라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사람에게 나아가는 유진의 방식은 일단 마음을 주면 깊었고 앞뒤를 재지 못했다.
“널 가벼운 밤 동무 상대로 생각한 것은 절대 아니다. 네 마음도 나와 같다면 네가 부마가 되는 것도 이 혼례도 무산될 것이다.”
“이 밤에 잠깐 실수하신 거라 여기겠으니 괘념치 마시어요. 사내들은 가끔 이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에게 실수란 없다. 재수가 없어 본 적도 없고.”
유진은 괘념치 말라고 선을 긋는 지우가 서운해 저를 만난 것을 불행에 불행이 얹힌 것으로 여기는 것이 속상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도검(刀劍)을 주워 칼집에 끼워 넣었다.
“나는 너를 만난 것이 좋았다. 함께 있으면서 마음이 편하고 즐거운 여인은 네가 처음이었다.”
지우는 볼이 달아올랐다. 분명 귀까지 빨갛게 되었을 것이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제 손으로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지우는 사내입니다. 강단이는 상것입니다. 누구도 영감님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울리고 말고는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정하는 것이지.”
유진은 지우의 뒤에 대고 단호하게 말하고는 먼저 마당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으니 나와도 된다.”
주변을 살피던 유진은 지우가 나오길 기다렸다. 공기가 무거워졌는지 흩날리던 하얀 배 꽃잎이 어느새 바닥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쭈뼛쭈뼛 나와보던 지우는 집으로 갈 길이 멀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유진을 따라가야 하는 강단이가 아니었다.
“유진이. 내일 보자고!”
호기롭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지우는 강단이처럼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하고는 급히 집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남촌에 있는 집 쪽으로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니 조금 전 이상한 두근거림이 유진 때문이 아니라 나졸들에게 쫓겨 어둠 속에서 사람을 봐 놀라서 그런 것이었다 하고 재차 되뇌었다.
‘영감님이 날 어찌 생각하든 난 얘기된 일만 잘 해내고 돈만 챙기면 된다. 너무 많은 말을 하였어. 그에게 안겨 감정을 보여서는 안 됐어. 눈물 같은 걸 보여서는 안 됐다. 어설펐고 틈을 보였다. 젠장.’
숨을 헐떡이며 집에 도착한 지우는 아직 호롱불을 켜놓고 삯바느질을 하는 끝명의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셔요?”
“후우... 나야. 지우.”
잠시 뒤 끝명이 문을 열며 환하게 웃었다. 잔머리가 여기저기 삐죽 나오고 입술이 하얗게 일었다.
“도련님! 이제 오셔요? 안 그래도 걱정 많이 했어요. 얼굴은 왜 그리 붉고 땀은 왜 그리 흥건하게 흘리셔요? 또 어디 아프신 거 아니어요?”
“순찰하는 나졸들 피해 요리조리 다니느라고.”
지우는 마루에 걸터앉아서 몸을 흔들며 피해 다닌 모양을 취했다.
끝명은 배시시 웃으며 문지방을 넘어 나왔다.
“오전에 텃밭에 잡초 뽑고. 집에 어르신도 도련님도 안 계시니 여간 적적한 게 아니어서 삯바느질 거리 좀 얻어왔어요. 도현 도련님께 말씀드리니 효원각 식구들 걸 얻어다 주셨어요.”
“너까지 돈 안 벌어도 된다니까.”
지우는 바지춤에서 오늘 효원각에서 정산받은 돈을 꺼내어 끝명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모아놨다가 어르신 오시면 장 볼게요.”
“너 먹고 싶은 것도 사.”
“... 저도 도련님 가족이잖아요. 돈도 벌고 나들이도 갈 겸해서. 가는 길이 어찌나 곱던지.”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지우는 음흉한 눈짓을 하며 끝명이를 놀렸다.
“하여간 짓궂어요. 도련님은. 대제학 댁 일은 어땠어요? 도련님이 만드신 술 좋아하시죠?”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어. 효원각보다 돈을 더 챙겨준다고 해서 며칠 머문 것일 뿐이야.”
“밤이 늦었는데 야식 좀 내다 드릴까요?”
지우는 끝명의 얼굴을 보더니 됐다고 일렀다. 혼자 있는데도 부지런히 밭을 살피고 소일거리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려 피곤해 보였다.
“잘래. 오늘 일이 많았어. 참! 나 하지 때 장가간대.”
끝명은 놀란 눈을 하고는 지우의 양어깨를 잡았다. 끝명의 쌍꺼풀 없는 눈 위로 난 짧은 속눈썹들이 앙증맞게 흔들거리며 말했다.
“도련님. 저도 갈래요. 절름발이 필요 없다고 하셔도 따라갈래요. 도련님 가슴 가리개며 속 고쟁이 누가 빨아요? 어르신은 도련님한테 왜 그러신대요? 사내로 키우면서 고생시킨 것도 성에 안 차신대요? 죽어가는 여자에게 장가보낸다니요! 이렇게 고운데!”
지우의 눈가가 또 촉촉해졌다.
“끝명아. 우리 도망가자. 단오 때쯤 도망가자. 너하고 나 둘이 있을 곳 없겠니? 도현에게 말을 준비해달라고 하자. 어때?”
“도련님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히잉. 끝명아~~.”
지우는 끝명이를 안고 훌쩍거렸다. 걸려서 죽으나 잡혀 죽으나 죽는 건 매 한 가지니 도망가는 것이 더 승산이 있어 보였다.
지우의 집에서 30보 정도 떨어진 곳 커다란 바위 옆에서 유진은 지우의 집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우가 뒤도 보지 않고 힘껏 뛴다고 해도 그 속도가 느려 유진이 젠젠 걸음으로 따라와도 쉽게 따라잡았다. 그걸 또 귀엽다고 실실거렸다는 것이 유진은 머쓱했다.
“이렇게 느려서야 어디 나한테서 도망이나 가겠느냐? 너와 두 번의 밤을 보내었다. 입도 맞추었고. 내가 널 책임지는 건 군자로서 당연한 일이다.”
유진은 사뭇 결연한 표정을 짓고서 뒤돌아섰다.
유진이 별채 앞에 이르니 방의 불이 켜져 있고 디딤돌 위에는 제 것이 아닌 태사혜(가죽신)가 놓여 있었다.
‘전하가 밤늦게 무슨 일로.’
유진이 방으로 들어서자 주상은 서책을 읽고 있었다. 서책에 깊이 빠져든 것인지 아니면 생각에 깊이 빠져든 것인지 유진이 들어오는 데도 주상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전하.”
그제야 주상은 천천히 유진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늦게 왔군. 어디를 다녀온 게야?”
“부마 간택 후보자 중 한 명인 강지우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그래?”
“...”
“오랜만에 왔는데 차 한 잔도 대접하지 않을 요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