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척.
주상이 책을 덮자 유진은 옆에 있던 물 주전자에서 물을 부어 주상에게 건넸다.
“개천이는 안채에 있고 저는 이제 들어왔습니다. 아닌 밤중에 몰래 오셔서는 술도 아니고 차를 달라 보채십니까? 물이나 드시고 해갈하십시오.”
“이래 봐도 짐이 왕인데 이 조선 땅에서 날 이리 하대하는 건 너뿐일 것이다.”
“제 누이를 데려가셔서는 마음 고생시키시고 전하의 못된 여동생은 아직까지도 저에게 안달이니 저에게 하대당하셔도 조금 참으십시오.”
“듣고 보니 너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도 싸구나. 물 한잔도 고마워해야겠군.”
주상은 물을 한입에 털어 넣고 그 물이 단지 ‘크흐’하고 소리를 내고는 크게 웃었다.
“둘 중에 강지우를 찾아간 건 왜지?”
“그것보다 왜 강지우, 그자를 간택하려 하셨습니까? 저도 모르게 부마 간택 후보에 들이시다니요? 강백단 어르신의 집은 휘랑 형님이 자결한 집입니다. 그때도 전하께서 그자에게 베푼 은덕으로 곤욕을 치르신 것을 잊으신 겝니까?”
유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지금의 주상은 그때 강백단과 그의 식솔들을 살려주고 세자를 죽음으로 몬 장본인으로 오해 받았다.
윤 대비 측에서는 휘우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었다.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면 휘우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주상은 대비의 눈 밖에 있었다.
“장 숙원이 전하의 편을 드는 건 이해가 가지만 강백단 어르신 쪽의 손을 드는 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지아비를 그렇게 잃고 어떻게. 장 숙원쪽에서 전하에게 원하는 게 있어 그런 것 아닙니까?”
“나에게서 아들을 낳아 준다고 하였다. 지우의 사주는 관상감에서도 풀 줄 아는 사주이니 다르게 말할 수 없었겠지.”
“하늘에서 하는 일을 어찌 그렇게 자신한답니까? 아들이라니.”
유진은 누이 재희를 생각했다. 재희는 어릴 적부터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았으나 건강하고 선했다. 그런 재희가 첫 아이를 태중에서 잃고 상심한 것이 유진은 안쓰러웠다.
그 뒤로 둘이 합궁조차 하지 않는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주상이 밉기도 하면서 부부 사이의 문제를 다른 이가 왈가왈부할 수 없어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었다.
장 숙원이 아들을 낳아 준다니 덥석 합궁이라도 하셨냐 하고 유진은 묻고 싶었지만, 후사 문제로 이미 주상이 삼상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걸 알기에 참았다. 대비는 장 숙원, 그 피에 담긴 영험하고 신성한 기운이 온전히 왕실의 것이 되기를 욕망했다.
“스승님과 그 식솔들에 관련한 건 형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부탁하신 것이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나를 부르셨다. 혹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
“그 여자아이를 지켜달라고. 자신의 죽음을 그때부터 준비한 것인지 아니면 예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유진은 제 도포 자락을 꼭 쥐며 주상에게 지금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눈으로 물었다. 주상은 옆에 놓인 물 주전자를 들어 아무렇지 않게 물을 따랐다.
주상은 목이 탔다. 장 숙원이 강녕전으로 들기 전부터 목이 탔었다. 저라고 그 여자가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혹 저주를 내릴까 혹 자신을 지금의 자리에서 끌어내릴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오만한 성격은 어떤 감정에도 위축되지 않았다.
“전하. 지금 무슨 말씀을. 그 여자아이라니요?”
“자네 눈빛을 보니 벌써 안 것 같은데 아닌가? 자네의 눈썰미라면 스승님댁에서 본 지우라는 사내가 여인이라는 것. 눈치챘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자네 코가 개코잖은가? 허허.”
“어쩌다.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처음에 듣고 깜짝 놀랐어. 형님은 진즉에 아셨던 것 같아. 어릴 적 스승님 댁에서 사시다시피 하셨고 그 아이가 특히 형님을 잘 따랐으니. 아무래도 형님은 그 아이를 특별히 여기셨던 것 같다.”
“그렇다고 궁으로 들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궁으로 들이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누구 하나라도 알게 되는 날에는, 지우 그 아이 하나로 끝나지 않을 일입니다.”
유진은 더 단호하게 말하려 하였으나 음성이 계속해 떨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어마마마와 영의정이 한 편이다. 장 숙원의 숙부인 성곤은 월도각을 운영하면서 한양과 팔도 곳곳에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네. 난 지금 내 사람이 필요해. 부마 후보로 올라온 이들 중에 삼상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어. 비록 여인이나 그 아이의 기개와 영특함은 사내들 못지않음을 내가 아네. 이를 계기를 스승님을 조정으로 모셔올 생각이야.”
“지우에게 가혹합니다.”
“지우? 내가 모르는 정분이라도 난 건가? 혼례를 앞두고서 여인네의 이름을 다정히도 부르고 말이야.”
“만약 은우가 내의원에서 말한 대로 단오 전에 죽기라도 한다면 말짱 도루묵 아닙니까?”
“하늘에 맡겨야지. 어떻게든 살도록. 그래도 동생인데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라야지.”
‘장 숙원. 은우를 하지 때까지 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치성환을 먹이든 굿을 하든 말이야.’
유진은 주상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려 주상의 뒤편에 놓인 병풍의 그림을 지그시 바라봤다. 난의 잎사귀를 쫓아가다가 끝에 이르러서 다시 말을 이었다.
“장 숙원이 지우를 밀었으니 공주의 액막이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하나를 내어주었으니 우리 쪽 출혈도 감수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비와 영의정 쪽에서 무엇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저희 아버지도 기회를 놓지 않으실 겁니다.”
“장 숙원이 아들을 낳을 것이고 난 침묵할 것이니 미리 겁먹지 않아도 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게 있네.”
주상은 씁쓸히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한양에 돌고 있는 청나라 돈의 반은 가짜라는 게 맞나?”
“네. 가치가 높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사기꾼들이 판치는 모양인데 출처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월도각 쪽인가?”
“청나라 상인이 제일 많이 드나드는 곳이니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직 증거가 부족합니다.”
“알겠네. 혼례가 있어 정신이 없겠지만 수고해 주게. 그래서 내가 특별히 휴가까지 길게 내려주지 않았나?”
“조만간 월도각에 잠입할 생각입니다.”
“조심하고.”
주상은 상 위에 원앙 자수가 놓인 주머니를 놓고 난 뒤 일어섰다.
“야명주(진주)야. 혼인 선물일세.”
“전하.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주상은 유진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번에는 혼인할 수 있길 비네. 지아비가 되는 건 참 녹록지 않지. 자네는 그 무게를 잘 견딜 것 같네만.”
주상이 문을 열자 개천의 동생 학천이 서 있었다. 학천은 개천보다 한 척이 더 크고 얼굴의 선이 굵었다. 주상의 호위무사였다.
“전하를 잘 모시게.”
“네. 영감.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침 문안 전에 강녕전에 들른 주상은 금침 위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장 숙원과 눈이 마주쳤다. 장 숙원의 얼굴에 주상을 향한 원망이 가득했다. 속이 훤히 비치는 속적삼 아래로 선홍빛 핏빛이 보여 주상은 눈을 돌렸다.
“지난 밤 전하는 저와 잠자리를 하신 겁니다.”
주상은 고개를 돌려 장 숙원을 보았다. 장 숙원의 허벅지가 은장도에 베여 아직도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대비 윤씨에게 함께 아침 문안을 가뵙고는 삼신 할매가 장 숙원에게 아들을 점지했다 하여 합궁하였다고 아뢰었다. 대비 윤씨는 이제야 주상이 정신이 온전해져 장한 일을 하였다며 다가가 주상의 손을 마주 잡고는 연신 쓰다듬었다.
어차피 죽을 딸의 남편으로 꼭 예조 정랑의 아들이 아니어도 되었다. 제 손바닥 위에 세자가 있을 테니 말이다.
지우는 짙은 안개를 뚫고 유진의 집 앞에 섰다. 유진의 혼례까지 이레가 남았다.
첫 번째 정혼자였던 공주는 혼례를 물러 겨우 살았지만 두 번째 정혼자였던 지금의 영의정 권도강의 손녀는 혼례를 끝까지 밀어붙여 전날에 죽었으니 세 번째는 어찌 될까 하고 온 한양 바닥 호사가들의 이목이 여기에 쏠려 있었다.
얼굴에 혈색이 돌던 하영이 무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우는 그 민망한 일을 뒤로하고 여기까지 왔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못나 보이려고 얼굴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게 했다. 제 얼굴을 보면 유진이 정을 뚝 뗄 거라고 확신했다.
차근히 생각해 보니 유진이 저를 신경 쓴 것은 여인을 향한 연정이 아니라 연민이었고 감사였다. 오늘, 신부가 될 어여쁜 하영을 보면 마음은 금세 돌아설 것이다. 해가 대문에 찬란히 비칠 때까지 지우는 생각에 잠겼다.
‘왜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것이야? 삯을 받으려면, 하영 아씨를 시집보내려면 어서 문을 두드려야지 지우야!’
지우가 이제 결심이 섰는지 문을 열려는 찰나, 누군가 안에서 문을 잡아당며 문이 열렸다. 문턱에 걸려 대문 안으로 넘어지자 유진이 지우를 붙잡았다.
“하여튼 칠칠치 못하요 넘어지기 일쑤구나. 고의적인 것이야? 나를 골탕 먹이려고?”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영감님이 안에서 나오실 줄 알았겠습니까? 투시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지우는 유진에게 못생겨 보이길 원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입을 새초롬히 하였다.
대문 앞에서 유진은 지우를 한참이나 기다렸었다. 안개가 옅어지면서 대문 밖에 머물러 있는 지우의 낡은 신이 보였다. 한참이나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지우 또한 무엇을 고민하는 듯했다.
‘이 문턱을 넘지 않을 생각이냐? 네 마음을 살피지 않고 내가 섣부른 거였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겠지?’
지우를 위해 유진이 먼저 문을 열었다. 지난날을 괘념치 않고 오늘을 무사히 함께 하기 위해서. 지우를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 동안에도 왜 이리 미소가 지어지고 간질간질 기분이 좋은 것인지.
유진은 그것이 금세 괴로움이 되어 낯빛이 싸늘해졌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영감님.”
“그러게나 말이다. 아침 일찍 온다고 해놓고 해가 이리 떠서야 온 것은, 네가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지우는 입을 앙다물고 코를 벌름거리며 말대꾸를 하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리. 아니다. 들어가자. 네가 나를 독경사(불경을 낭독해 주는 맹인)로 데리고 간다고 하여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외우며 마당을 거닐다가 문을 연 것이 네가 딸려 들어온 것이다.”
“네. 쇤네가 굳이 대문을 그때 열어서는. 죄송합니다.”
방에 마주 앉은 지우에게 유진은 약과를 건네었다.
“아침도 못 먹고 온 것이야? 어제보다 더 비쩍 골고 못 생겨 보이는구나.”